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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성지순례-보드가야

가람지기 | 2008.11.03 17:26 | 조회 5908


2575년 전 12월 8일(음력) 새벽. 오랜 고행 끝에 드디어 無上의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은 스스로 이렇게 成道宣言을 했다고 《상유타니카야-아함경》는 기록하고 있다.

成道.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말이다. 고뇌하는 싯달타는 이 날 正覺(boddhi)을 얻음으로써 이후부터 佛陀(Buddha:깨달은 사람)라고 불리게 되었다.깨달음의 聖地 보드가야. 부처님의 깨달음을 기념해 붙여진 이름이다. 육신으로서의 부처님은 카필라바스투의 왕자로 룸비니 숲에서 태어났지만 法身으로서의 부처님은 이곳에서 태어났다.그런 뜻에서 이곳은 불교의 역사가 시작된 땅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예로부터 佛敎徒들은 보드가야를 어느 곳보다 성스러운 곳으로 생각했으며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아 참배했다.

보드가야는 일찍부터 부처님의 성도와 관련해서 '삼보디' 또는 '마하보디'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13세기경 이곳을 찾아온 티베트의 순례승 다르마스마빈은 바즈라 아사나(金剛寶座)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보드가야의 보다 오랜 이름은 붓다가야(Buddha-gaya). 우리 나라의 伽耶山은 여기서 그 이름을 따왔다.보드가야는 인도 비하르 州의 가야 市 남쪽 10km되는 지점, 즉 東經 85도의 子午線上에 위치해 있다. 비하르(Bihar)라는 말은 寺院이라는 뜻. 그 옛날 비하르 땅에는 나란다 대학 등 수많은 불교사원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가야 시에서 오른쪽으로 가야쉬르사 언덕(지금의 브라후마요니 언덕. 漢譯으로는 象頭山)과 왼쪽으로는 나이란자나 江을 사이에 두고 前正覺山을 바라보는 평탄한 길을 가다 보면 보드가야大塔의 끝머리가 푸른 나무 숲 사이로 멀리 보인다.

보드가야 大塔 건너편, 그러니까 나이란자나 강(泥連禪河) 언덕에는 苦行者였던 부처님이 촌장의 딸 수자타로부터 우유죽을 공양받았다는 乳菓林이 있다.아름다운 소녀가 올린 우유죽 공양 어쩌면 苦行 修道者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처님과 함께 수행하던 5명의 동료는 '타락한 沙門'이라면서 떠나갔다고 경전은 기록하고 있다. 홀로 남은 부처님은 강기슭 가까운 곳에 있는 핍팔라 나무 아래서, 마침 풀을 베고 있던 한 사나이로부터 얻은 한 다발의 吉祥草를 깔고 앉으며 이렇게 다짐했다.

"이제 만일 여기서 번뇌를 멸하고 미혹과 거짓의 세계를 벗어나는 길을 찾지 못한다면 설령 이 몸이 가루가 된다 하더라도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리라."

金剛과 같이 단단한 결의를 한 부처님의 가슴에는, 지난 6년 동안의 처절했던 고행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29살에 인생의 궁극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속의 모든 영화를 포기하고 출가한 부처님의 발걸음은 쿠시나가라와 바이샬리를 거쳐 남으로 향했다. 뒷날 마가다국의 수도가 되는 파탈리푸트라를 지나고 갠지스강을 건너 문물이 번창한 라자그리하를 지나 종교의 성지로 이름난 가야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부처님은 아라다 칼라마와 웃드라카 라마푸드라라는 두 사람의 스승을 비롯해 숱한 고행자들을 만나 수행을 했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부처님은 6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가야에서 조금 떨어진 前正覺山에서 지독한 고행 수련의 시간을 보냈다. 라호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간다라 시대의 苦行像(3세기경 작품)을 보면 그것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차라리 해골이라고 해야 어울릴 그런 모습이다. 앙상한 갈비뼈는 廢家의 서까래처럼 보이고 그 위에 몇 가닥 흩어진 혈관은 넝쿨처럼 보인다. 겅전은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부처님은 하루에 오직 한 알의 참깨나 쌀을 먹고 지내거나 전혀 음식을 먹지 않고 끊는 일도 있었다. 부처님의 몸은 극도로 여위어 금빛이던 몸이 검은빛으로 변했다."

그러나 이런 고행을 통해서도 결국은 바라던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부처님은 고행을 포기했다. 泥連禪河로 내려와 목욕을 한 뒤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을 받고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다시 원기가 회복되자 강기슭의 나무 아래 앉아 마지막 명상에 잠기게 된 것이다. 나무 아래 앉은 부처님의 마음에는 온갖 유혹이 거듭됐다. 경전은 그것을 악마가 魔軍을 끌고와 위협도 하고 美女로 변해 유혹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12월 8일. 부처님은 드디어 깨달음을 얻는다.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안개가 일순간 개이고 몸과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모든 의혹은 사라졌다. 生老病死라는 인간 苦의 원인을 밝혀내고 완전한 해탈을 성취한 것이다.

일구월심 사유하던 수도자에게

모든 존재가 밝혀진 그날

그의 의혹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緣起의 이치를 깨달았으므로

《自說經》 菩提品에 있는 이 한 구절은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이 인연과 조건관게에 의해 존재한다는 '연기의 진리'였다.

이때 부처님의 나이는 35세. 이로써 인류는 암흑으로부터 광명을 얻었고 미혹으로부터 진리를 알게 되었다. 무심한 바위, 한 포기의 풀까지도 부처님의 成道로 큰 영광을 입게 되었다. 부처님에게 그늘을 드리워 주었던 핍팔라樹는 '깨달음의 나무(菩提樹)'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깔고 앉았던 바위는 '金剛寶座'로 불리게 되었다. 또 음습한 땅에서 자라는 보잘것없는 풀은 부처님이 앉는 방석이 되었기 때문에 吉祥草가 되었고, 성도의 가야 마을은 영예스럽게도 '깨달음의 가야'라는 뜻의 붓다가야로 불리게 됐다.

깨달음의 땅 보드가야는 이후 불교도들에 의해 聖地로 가꾸어졌다. 아쇼카 왕은 이곳을 참배한 후 石柱를 세우고 精舍를 지어 공양했다.

불교의 고향 보드가야는 13세기경 이슬람의 군대가 인도에 침입하면서 地上에서 일시 모습을 감추었다. 이슬람의 무자비한 파괴로부터 聖地를 지키고자 불교도들은 아쇼카 왕 때 건립돼 여려 차례 증축을 거쳐 6세기경에는 50m의 方錐形 대탑이 된 보드가야 대탑을 흙으로 파묻어 버린 것이다.

보드가야 대탑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1881년 영국의 고고학자 커닝햄이 이 주변 일대를 발굴하면서 찾아냈다. 보드가야가 분지로 보이는 것은 발굴 당시 흙을 파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6백 년 이상 잠자던 이 성지는 발굴 당시 불교도의 소유가 아니었다. 당시 이 지역의 땅은 마한타라는 힌두교 村長의 소유였다. 그는 精舍의 경내에 비슈누 神像을 건립했으며 요즘도 힌두교도들은 이곳을 성지로 참배하고 있다.

보드가야가 불교도의 관리로 넘어온 것은 1953년 스리랑카 불교도들의 노력에 의해서다. 특히 大覺會 창설자인 다르마팔라의 힘이 컸다.현재 보드가야 주변에는 미얀마·스리랑카·타이·티베트·일본에서 절을 세우고 승려를 파견하고 있으나 한국 절이나 승려는 없다.

보드가야 大塔은 탑이라고는 하지만 스투파가 아니라 佛像과 금강보좌를 수용하는 사당이다. 외벽을 장식한 수많은 감실에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고 그 사이를 메우고 있는 꽃잎과 초목의 장식 조각은 매우 아름답다.7세기경 이곳을 참배한 중국의 玄 (622∼664)은 대탑의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보리수 동쪽에 정사가 있다. 높이가 160∼170척이 되고 아래 기단 넓이는 20여 보가 된다. 푸른 기와로 쌓고 나서 그 위에 석회를 발랐다. 여러 층으로 겹쳐진 감실에는 모두 각각 金像이 들어 있다. 사방 벽에는 진기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염주를 이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곳도 있다……"

이 기록은 2백 년 앞서 이곳을 찾은 法顯이 '탑을 짓고 像을 만든 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간단하게 기록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대탑은 스리랑카와 미얀마의 왕에 의해서 몇 차례 보수된 적이 있으며 때로는 스리랑카 비구가 많이 체류하기도 했다. 현장도 보리수 북문 밖에 있는 마하보디승가람에는 執獅子國(싱할라. 지금의 스리랑카) 승려가 많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근처에는 작은 祈願塔들이 즐비하다. 이 탑들도 작은 塔身에 감실을 설치하고 불상을 봉안하고 있어 부처님에 대한 불교도들의 존경이 얼마나 열렬한지를 말해 주고 있다.

보드가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聖物 가운데 하나는 보리수. 대탑 서쪽에 있는 이 나무는 여러 차례 세대교체를 겪었다.

3세기경 아쇼카 왕은 이곳을 참배하고 나서 '10만금을 들여 보리수를 공양하라'고 찬미하고 향수를 뿌려 공양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는 또 5년마다 이 나무 밑에서 큰 법회를 열도록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의 왕비 티샤락시타는 異敎徒였기 때문에 사람을 시켜 보리수를 잘라 버리려고 했으나 아쇼카 왕의 만류로 겨우 살아났다는 전설도 있다. 또 6세기경에는 사샹카 왕이 불교를 탄압하기 위해 이 聖樹를 베어 버렸으나 아쇼카 와의 후예 푸르나바르만 황이 수천 마리의 소에서 쩐 우유를 붓자 신비하게도 새싹이 움터 되살아났다는 일화도 있다.

현재의 보리수는 스리랑카에서 씨를 받아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3세기경 이슬람의 아쓰마 왕이 인도에 침입, 보리수를 베어 버린 뒤 붓다가야에는 보리수가 없었는데 2백 년 전 한 스님이 스리랑카로 가서 씨를 가져다 심었다고 한다.스리랑카의 보리수는 아쇼카 왕의 딸 상카미타가 비구니가 되어 오빠 마힌다 長老와 같이 스리랑카로 가서 傳法할 때 가지를 꺾어다 심은 것이니까 혈통으로는 傍系인 셈이다. 正傍의 인연이 기구하게 얽힌 보리수를 보면 불교의 생명력이 얼마나 끈질긴 것인지를 새삼 깨

닫게 된다. 현재의 나무는 1876년 폭풍으로 쓰러진 고목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 자란 것이다.또 하나의 聖物은 금강보좌. 그리고 대탑을 참배하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모여드는 순례자의 발길은 1년 내내 그침이 없다.

참조: 다음카페 원불사에 올려진

깨달음의 聖地 보드가야를 찾아서 - 홍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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