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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 스님-학인 스님들을 초청하며

가람지기 | 2008.03.29 13:57 | 조회 4406
“산하대지의 아픔 함께 합시다”
수경 스님-학인 스님들을 초청하며
기사등록일 [2008년 03월 24일 월요일]

종교환경회 순례단의 일원으로 운하 예정지를 순례하고 있는 수경 스님이 3월 13일 「법보신문」에 운문사승가대학을 비롯, 각 강원에서 수행․정진하고 있는 학인 스님들을 순례 행렬에 초청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특히 스님은 3월 7일 문경 봉암사에서 봉행된 ‘부처님 마음과 생명의 눈으로 우리의 삶을 성찰하는 참회·정진 법회’에 동참했던 운문사 학인 스님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도보 순례는 수행과 성찰의 과정이기에 함께 할 것을 요청했다. 편집자

3월 7일 문경 봉암사에서 열린 ‘부처님 마음과 생명의 눈으로 우리의 삶을 성찰하는 참회·정진 법회’를 감동적으로 장엄해 주신 운문사 학인 여러분!

먼저 이 법회를 주관한 종교환경회 순례단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존경을 담아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날 여러분들의 모습은 눈부셨습니다. 아무 말 없이도 승가의 위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덕분에 여러분들을 외호하는 재가 대중의 모습도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진정한 불국토의 장엄이란 신실한 믿음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여러분들의 겸손하면서도 반듯하고 절도 있는 모습은 그 어떤 설법보다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저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도반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운문사 학인 여러분!

그날 여러분을 보면서 40년도 넘은 저의 초심 학인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한 때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세상과 타협할 일도, 무엇 하나 눈치 볼 일도 없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던 그런 시절 말입니다. 탁발을 하면서 어른 스님 시봉을 하고, 제방을 두루 참례하면서 여러 선지식을 만났습니다. 한때는 천하를 통째로 삼킬 양으로 토굴 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시절 인연으로 환경 운동의 말석에 서게 되었습니다. 난폭한 주인이 노예를 부리듯 자연을 대하는 세상의 성정을 제도할 법력은 턱없이 모자라는지라, 고통 받고 신음하는 자연과 함께하는 쪽을 택한 것이지요.

여러분의 모습에 수행자로서 저의 삶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확철대오는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할지라도 초발심이나마 제대로 지키며 살아왔는가 하고 자문해 보았습니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중생제도는커녕 내 몸 하나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과연 제대로 된 중노릇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모시고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서원한다고 절리 그리 되는 것일까요? 혹시 그것이 ‘거룩한 삶’을 산다는 ‘짓거리’의 함정은 아닐까요?

운문사 학인 여러분!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중생 제도’일까요? 소박하게 얘기하자면 먼저 수행자로서 제대로 된 중노릇을 하는 것이겠지요. 조사 스님의 말씀에 기대어 표현하면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겠지요.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는 곳마다 진리의 땅이 되게 하는 삶을 사는 것 말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을 일러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선 자리를 절대 평등의 땅으로 만드는 참사람, 출가 수행자라면 당연히 꿈꾸어야 할 이상형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일까요? 적어도 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직 수행이 부족해서’라는 말로 피해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라면 자라는 대로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진솔한 말과 행동으로 부처님의 삶을 따르는 것으로 한 걸음이라도 더 그러한 삶에 다가갈 뿐입니다. 이생에서는 언저리에도 미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내세’를 핑계로 이생의 실패를 합리화화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 순간 내가 선 곳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말고는 더 생각할 게 없습니다. 지금은 오직 강을 따라 흐르는 일이 그것입니다. 걷고 또 걸으면서 매순간 도처에서 빛나는 ‘법신(法身)’의 광휘를 느낄 뿐입니다.

운문사 학인 여러분!

여러분과 함께 걸으며 산하대지의 무진 설법을 듣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상상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저는 요즘 강을 따라 걸으면서 새삼 놀라는 것이 우리의 산하에 대해 너무 무지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비경이니 절경이니 하는 곳을 찾는 일이 참 실없는 짓이구나 하는 것도 느낍니다. 조고각하((照顧脚下)의 가르침은 우리의 국토에 대해서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대운하 문제에 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계획을 세운 사람들은 지도를 펼쳐 놓고 지극히 기계적인 발상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 몸으로 느껴집니다. 답사를 했다면 고도의 기술과 막대한 비용이 요구되는 일부 구간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접해 보면 지도에 표현된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두물물이 법신의 현현이라는 말을 절실히 느끼는 요즘입니다. 여러분을 기꺼이 순례에 초대하고 싶은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비경이나 절경을 찾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서 아름다움에 감동할 줄 아는 심미안을 발현시키는 것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제 말은 결코 수사적 표현이 아닙니다. 걸어보면 누구라도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걸음이 단순히 대운하 반대가 아니라 수행과 성찰의 과정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운문사 학인 여러분, 그리고 한국 불교의 모든 학인 여러분!

여러분을 순례에 초대합니다. 함께 걸으면서 관용적 추상어가 되어버린 ‘깨달음’이니 ‘중생제도’니 하는 말을 현실 공간에서 살아 숨 쉬게 합시다.

사찰의 중요한 구실 중 하나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번뇌와 욕망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모든 사찰은 ‘세상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과서도 강의실도 교사도 없지만, 만물로부터 스스로 가르침을 얻게 하는 그런 학교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학교가 가능하려면 수행자의 일거수일투족이 본보기가 되어야 하겠지요. 그렇다고 그 모습이 거룩한 모습을 지어 보이는 것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절절한 마음으로 세상과 세상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헤아리고 함께 하려는 자세가 더 중요하겠지요.

식자깨나 든 불자라면 누구나 자랑처럼 내세우는 ‘불이(不二)’의 정신도 사실상 죽은 언어입니다. 승속불이니, 세간과 출세간이 다르지 않다느니 하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 봉암사 법회에서 운문사 학인들과 재가 대중들이 어우러진 모습을 보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중노릇을 하면 저잣거리에 서도 그곳을 출세간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고, 그냥 밥만 축낸다면 심산유곡에서 신선 흉내를 내도 저자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될 것입니다.

최근 입버릇처럼 들먹이는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말도 구호의 차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외양을 꾸미는 데만 용심을 썼지 실천 의지는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일을 해 주십시오. 세간 사람들이 산문에 들면 그곳을, 여러분들이 세간으로 나가면 그곳을 진리의 땅이 되게 해 주십시오. 진정 세간과 출세간이 둘 아닌 도리를 실천으로 보여 주십시오. 여러분이 희망입니다.

사실 강을 따라 걷는 일은 작은 일입니다. 정녕 중요한 것은 모든 수행자들이 현실 공간에서 부처님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다만 저는 지금 저에게 주어진 걸음을 걸을 뿐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이 길을 걸을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모두들 각자가 선 곳에서 제대로 공부 한번 해 보십시다.

불기 2552년 3월 13일 낙동강에서

만생명의 평화를 기원하면서 수경 합장


942호 [2008-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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