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화합 - 사집과 불수

가람지기 | 2017.04.19 12:54 | 조회 111

안녕하십니까? 별 헤기 좋은 계절에 차례법문을 하게 된 사집반 불수입니다.

제가 질문하나 드리겠습니다.

대중스님들 화합하십니까?”

...

이 질문과 대답은 우리가 일 년에 두 번 있는 포살 때 행해지는 문답형식입니다. 저는 행자시절 포살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른 채, 포살을 한다기에 큰절을 따라 갔습니다. 큰 법당에는 수백 명의 스님들과 안거수행중인 재가불자들이 빼곡히 앉은 가운데 분위기는 엄숙 하다 못해, 고개도 한번 돌릴 수 없을 만큼 삼엄한 분위기였습니다. 포살이 시작되고 법좌에 앉은 유나스님께서는 대중들을 향해 질문을 하십니다. “대중스님들 화합하십니까?” 저는 순간 숨이 꽉 막혔습니다. 분별하고 있는 제 마음을 들킨 듯, 그리고 이 많은 대중에게 질문을 하면 어떻게 대답을 할까? 하고 오만가지의 망상이 지나가고 있을 때 대답은 의외로 너무나 빠르고 쉽게 그리고 퉁명스럽게 네 화합합니다.”라고 앞자리에서 큰소리로 대답이 들렸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니 저만 놀란 눈치였습니다. 고개를 떨구니 포살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 적혀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대답은 앞자리의 병법스님이 한다고 하셨습니다.

 

격변하는 이 시대에 불교에서 화합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시기전에 가장 많이 염려했던 부분이 화합 이였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워낙 많아 화합이 되지 않을까 염려 하셨고, 만약 화합하지 못하면 불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할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불교 교단(僧伽)의 화합을 위해 육화경법(六和敬法)으로 화합대중(和合大衆)의 덕목을 설하셨습니다. 운문사에도 육화당六和堂이 있듯, 치문때 배운 육화경법을 떠올려 봅니다. 종강 때 시험에 나온다고 달달 외웠지만 결국에는 나오지 않아 잊혀 졌던 문제였습니다.

 

첫 번째는 같은 규칙, 계율로 화합하며 함께 노력하는 계화동수(戒和同修)입니다.

나의 치솟는 아만과 탐진치를 규칙과 계율을 지킴으로써 수행의 처음을 시작하고 완성을 만들어 냅니다.

두 번째는 몸의 기운이 화합하며 같은 공간에서 함께 거처하는 신화동주(身和同住)입니다. 청풍료라는 한 공간에서 두 반이 부대끼며 생활하고, 함께 합송을 하고, 입선을 들이고 잠을 자다보니 모든 행동은 조심스러우며, 타인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운문사라는 곳에 같이 모여 생활하다 보면 함께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고 생각하는 바도 비슷비슷해집니다. “대중이 공부를 시켜준다는 말이 있듯 대중생활을 통해 서로가 규율을 지켜가면서 배움을 얻습니다.

세 번째는 입으로 화합해서 다툼이 없게 하는 구화무쟁(口和無諍)입니다.

입은 많은 병과 불화를 만들어 냅니다. 순간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 우리는 거짓말, 이간질하는 말, 상처 주는 말, 그리고 유혹하는 말 등 교묘하게 자기 조차도 속이는 말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드러나고 진실과 함께 인격도 드러납니다. 정직하고 자비심 있는 배려하는 말의 습관을 실천해야 합니다.

네 번째는 이익으로 화합해서 똑같이 나누는 이화동균(利和同均)입니다.

개인은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을 기본으로 하고 보살핌이 더 필요한 사람이 생기면 대중의 동의하에 배려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뜻으로 화합하며 함께 기뻐하는 의화동열(意和同悅)입니다. 우리 사집반은 지대방에서 간식 먹을 때에 제일 의화 동열이 잘 이루어집니다. 간식의 반가움과 맛있는 음식은 우리의 뜻을 한곳으로 모우고 기쁨을 자아냅니다.

여섯째는 견해로 화합해서 함께 이해하는 견화동해(見和同解)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 중심에 놓고 목표와 방향성 그리고 방법을 보는 견해가 일치하고 화합하는 공동의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삼보에 대한 귀의법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승가가 화합 할 수 있는 가능성, 뿐만 아니라 우리가 화합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사료되어집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공허감과 허무함이 늘 가슴 한켠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불교를 처음 접했을 때 몽매함에서 깨어난 듯, 머리는 시원했고 가슴은 뜨거웠습니다.

마을에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음을 알고, 때를 기다렸다가 출가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태어나 제일 잘한 것이 출가이고 앞으로도 그럴 꺼라 생각이 듭니다.

마을에서 그렇게도 찾아 헤매였던 나와 통하는 친구가, 스님이 되니 강원에 이렇게 많은 도반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신기하고 고마웠습니다. 삭발 염의한 것만으로도 이미 마음은 전해졌고, 군더더기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아 그 소중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무명 업식에 어두워 오늘도 그 소중함을 망각한 채, 내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 상대를 평가하고 시시비비 따지기 바쁘며, 날뛰는 원숭이와 같은 이 마음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경계에 따라 욕을 얻어 먹으면 욕한 사람에게 가 붙었다가, 칭찬을 들으면 칭찬한 사람에게 옮겨가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갔다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붙었다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음이란 놈이 온갖 번뇌며 애욕, 집착꺼리를 잔뜩 짊어지고 돌아옵니다. 이러니 삶의 에너지는 점점 쇠잔해지고 헛헛한 마음만 늘어 갑니다.

 

그리고 다시 제 정신으로 깨어나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 전에 예불을 올리며 비로소 몸과 마음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집중하며 중심을 잡고 어리석음을 참회합니다.

일상생활을 떠나서는 도를 구할 수 없듯이, 다양한 성품(性品)과 근기(根機)들이 모인 대중에서 신구의(身口義) 삼업(三業)으로 화합하고 계율을 준수하며, 콘크리트보다도 더 단단한 아상의 틀을 깨고, 제행이 무상하여 제법이 무아인 이치를 끊임없이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 사성제와 십이 인연법을 제대로 발현할 때 지혜와 자비는 증장하며 나 자신과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화합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공간에, 이 시간에 많은 대중스님들과 함께 해서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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