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공평함을 닦는 수행 - 사교과 도명

가람지기 | 2017.04.19 13:00 | 조회 145

안녕하십니까 사교반 도명입니다. 푸르름이 힘차게 움트는 봄, 자라나는 힘으로 대지가 진동하는 아름다운 봄입니다. 운문사에서 세 번째 봄을 맞이하며, 수행에 있어 제게 꼭 필요하지만 어려운 부분에 대해 돌아보았습니다. 오늘 저는 공평함을 닦는 수행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치문반 때 저를 지켜주던 부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라훌라야, 땅을 닮는 수행을 닦아라. 라훌라야, 땅을 닮는 수행을 닦으면 마음에 드는 감각접촉과 마음에 들지 않는 감각접촉이 일어나더라도 그런 것이 마음을 사로잡지 못할 것이다. 라훌라야, 예를 들면 땅에 깨끗한 것을 던지기도 하고 더러운 것을 던지기도 하고 똥을 누기도 하고 오줌을 누기도 하고 침을 뱉기도 하고 고름을 짜서 버리기도 하고 피를 흘리기도 하지만, 땅은 그 때문에 놀라지도 않고 모욕을 당하지도 않고 넌더리치지도 않는다. 라훌라야, 그와 같이 땅을 닮는 수행을 닦아라. ...”

 

맛지마 니까야 <라훌라를 교계한 긴 경>에서 부처님께서 라훌라 존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저에게 이 말씀이 그렇게 와닿았던 것은, 받아들이고 수순하는 것이 어렵고 그만큼 이 몸과 마음에서 현실을 싫어하고 밀어내는 경험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드는 것에 기뻐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에 화내면서 마음에 드는 것만 하려고 하는 뿌리 깊은 습관을 가지고 대중에서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무언가 불꽃 튀는 충돌과 굉음과 아픔이 예상됩니다. 이런 저를 받아주신 바다와 같은 청정대해중 스님들, 감사드립니다. 원하는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대상에 화내지 않는 것이 공평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라훌라에게 공평함의 특징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라훌라야, 땅을 닮는 수행을 닦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땅과 무엇이든 씻어내는 물과 무엇이든 태우는 불과 무엇이든 불어 날리는 바람과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는 허공이 가진 공평함이라는 특징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라훌라야, 자애의 수행을 닦아라. 라훌라야, 네가 자애의 수행을 닦으면 어떤 악의라도 다 제거될 것이다.’라고 하시며 부처님께서는 수행자가 무엇을 조건으로 공평해지는지 가르치시기 위해 차례로 자애, 연민, 더불어 기뻐함, 평온을 닦는 수행을 설하십니다. 자애의 수행을 할 때, 먼저 자신을 자애로 가득 채웁니다. 그 다음 존경하는 스승이나 그와 같은 분이 행복하시기를 바라며 자애를 닦습니다. 그 다음 좋아하는 친구, 무관한 자, 원한 맺힌 자에 대해 차례로 자애를 닦습니다. 이렇게 나라는 한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한계를 부수어 갑니다.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자신과 좋아하는 자와 무관한 자와 싫어하는 자, 이 넷에 대한 차별의 한계를 부수고 자애로 평등하게 채웁니다.

 

이렇게 닦은 공평함을 바탕으로 수행자는 좋아하는 마음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지혜를 계발합니다. 만약 좋아하지 않는 대상이 싫다고 화내고 외면하거나 좋아하는 것만 보려 한다면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대상이든 받아들이는 땅의 특성을 배우는 것이 수행에서 라고 내 것이라고 나의 자아라고 집착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대상을 지켜보는 태도에 결정적으로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의 일상에서 좋아함과 싫어함으로 인한 온갖 번뇌들을 단속하고 보호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계행입니다. 계는 단속이고, 의도이며, 모든 유익한 법들의 토대가 됩니다. 소욕지족으로 계를 받아지녀 청정한 수행자, 세간의 집착을 버리고 열반에 수순하는 도를 닦는 수행자들에게 세존께서는 13가지 두타행을 허락하셨습니다. 두타행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철저한 버림이고, 번뇌를 소멸하여 청정함에 이르는 서원의 자발적인 실천입니다.

 

누구든 자기의 좋아함이나 선택으로 재가자가 준 것을 받는 순간에 그의 두타행은 무너진다. 이것이 여기서 무너짐이다."

 

사집반의 어느 날, 사부 니까야에 대한 주석서인 <<청정도론>>을 읽다가, 온 몸과 마음이 전율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수행이 얼마나 지극한 청정함을 바탕으로 하고 목표로 하는지 벅찬 감동과 존경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마음 속 의도가 계행의 기준이 됩니다. 음식, 옷과 거처 등 필수품을 수용함에 있어 좋아함과 싫어함이, 탐욕과 성냄이 있는가? 이 질문이 수행의 척도가 되고 방향이 되고 단속이 됩니다. 강원에서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 모든 일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갑자기 이해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분소의를 입는 수행을 할 때, 차례대로 일곱 집을 탁발하는 수행을 할 때, 원하는 것을 선택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는대로 받을 뿐입니다.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이나 많거나 적거나 차례대로 일곱 집에서 주는 것을 먹습니다. 선택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받아 지닌 두타행 안에서 욕망을 버렸기 때문에 자유롭습니다.

 

이제 경반이 되어, 차례대로 탁발을 하시고 한 자리에서 공양을 마치시고 앉아서 선정에 드시는 부처님의 일상을, 여일한 평상심을 매일 배웁니다. 부처님께서 행하시고 허락하셨던 두타행 중 어떤 것은 지금 우리의 일상에 스며 있습니다. 배정된 자리에 머무는 수행이 있습니다. 배정된 방사, 정해진 자리에서 자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확장해 보면 예불, 발우공양, 상강례, 수업에서 정해진 자리에 앉을 때, 이렇게 정해진 차례대로 차례법문을 할 때 두타행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반장, 부반장 등 차서대로 돌아가는 소임이 있습니다. 배정된 그 소임을 살리라 하는 의지를 가진다면, 그것이 우리의 두타행일 수 있습니다.

 

두타행의 특징은 받아지니려는 의도입니다. 받아들이는 의도가 바로 두타행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있는 군인이 있습니다. 또 움직이지 않고 있는 수행자가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릅니다. 근육의 긴장도, 느낌, 생각, 의도가 다릅니다. 가끔 잊어버리면, 마치 강제징집된 군인처럼 경직되어서 속으로 투덜거리며 기계적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깨어 있을 때는, 감사와 서원으로 자발적으로 이 청규들을, 나를 단속하고 대중을 배려하는, 삼가는 태도로 보호로 받아지닐 때는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지극한 청정함으로 이끄는 토대를 다지는 수행이 됩니다. 같은 청규, 같은 환경과 사람들, 같은 소임입니다. 내 태도와 의도에 따라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타행 중에, 공동묘지에 머무는 수행이 있습니다. 보통사람들에게 묘지는 묘지일 뿐입니다. 혐오 시설이 수행처가 되는 것은, 욕망을 버리고 무상함을 관찰하고자 하는 수행자의 분명한 의도와 서원 때문입니다. 묘지에서 홀로 시체가 썪어가고 변형되는 과정을 관찰하는 수행자는, 공동묘지로 가기 전에 스승께 알립니다. 외호하는 승단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행자는 두려움을 떨치고 묘지에서 시체를 관찰하며 머물 수 있습니다. 운문사는 수행하기 참 좋은 곳입니다. 수행의 터전을 만들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출가로 이끌어 주신 은사스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내려와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는 교수 스님들과, 편안히 공부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외호해 주시는 어른 스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법을 이어오며 든든한 수행의 기반을 마련해 주신 비구니 승단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모든 부족함을 감내하고 받아들여주는 땅과 같은 도반 스님들, 윗반 아랫반 스님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인연에 감사드립니다.

이 도량의 모든 분들이 지금 수행하는 공덕으로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한 열반에 이르시기를 삼세의 부처님과 오백 아라한 성중께 발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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