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대승의 길_조인스님

가람지기 | 2011.12.26 13:38 | 조회 3255


대승의 길

사교반 조인스님     

 

안녕하십니까. 사교반 조인입니다.
저는 ‘대승의 길’이라는 주제로 차례법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많은 불교의 학파와 부파들이 생겨났습니다. 여러 혼란의 시기를 거치면서 대승불교가 출현하였는데 대승불교란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여 태우는 큰 수레’라는 뜻으로 일체 중생의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에 이르고 난 뒤 다른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성불을 뒤로 미루는 보살이 되는 것을 목표로 자리이타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이타행은 타종교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것입니다. 대승의 길에 섰는지 구별하는 것은 마음의 흐름에 보리심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보리심이 없는 수행자는 아무리 수행을 해도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을 뿐 아니라 보살행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가난한 여인이 아주 작은 등불을 부처님께 공양 올렸는데 밤이 되어 아난다가 그것을 아무리 끄려해도 끄지 못했습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이 등불은 큰 바람이 몰아쳐도 끌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그 여인이 보리심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향을 피우더라도 보리심으로 피우게 되면 백명의 중생을 생각하면 백명이 향을 피운 공덕이 생기고 천명의 중생을 생각하면 천명이 향을 피운 공덕이 생기게 된다고 합니다. 보리심을 가지고 어떤 동물에게 약간으 음식을 보시하여도 보살행이 일어나게 되며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원인이 생기게 됩니다. 보리심 없이 공성으로도 지혜의 덕은 쌓을 수 있지만 복덕을 쌓을 수는 없습니다.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보리심을 가져야 합니다. 참선이나 명상을 하면서도 보리심이 있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또, 대승의 보살이 된다는 것은 먼저 보리심을 일깨우는데서 시작합니다. 보살들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자비심을 행하며 중생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깨달음을 구합니다. 보살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중생을 위한 자비심을 기르기 위해 수행합니다. 자비심을 이용하여 성냄을 제거하고 무상과 고를 통해 욕구를 제거하며 공성에 대한 명상과 연기법의 반조를 통해 무지를 제거합니다. 보리심을 일깨운 보살은 다시 부처의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을 합니다. 오직 부처의 경지만이 무한한 지혜와 자비의 근원이며 개인의 근기에 맞게 가르침을 펼수 있는 완전한 깨달음이며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부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어 자기 스스로의 법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사람을 연각 또는 독각이라고 하고 대승을 위하여 나아가는 이들을 보살이라고 하며 소승의 수행자들을 성문이라고 합니다. 대승의 보살은 다른 사람을 구제하여 부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성문은 자기만이 수행해서 아라한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하지만 부처는 될 수 없다고 합니다.

‘보리행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몸과 재물 그리고 삼세에서 얻어진 공덕을 나는 미련없이 모든 생류의 이익 성취를 위해 버린다. 열반이란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이다. 그리하여 나의 마음은 열반을 추구한다. 내가 모든 것을 버려야만 한다면 차라리 생류에게 그것을 주는 편이 나으리라. 모든 방향에서 몸과 마음의 병에 걸려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내 공덕에 의해 행복과 환희의 바탕에 도달할 지어다. 세간의 어떠한 괴로움이 있을지라도 그 일체는 내 속에서 무르익을 지어다. 보살의 모든 공덕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행복할 지어다. 대중스님 여러분 정진여일하십시오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