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소임을 산다는 것_지원스님

최고관리자 | 2012.07.26 11:15 | 조회 3577



소임을 산다는 것


사교과/지원

길고 길었던 봄철이 지나고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여름철도 벌써 반이 지나 차례법문의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대중스님들은 모두 건강하십니까? ‘소임을 산다는 것’이란 주제로 차례법문을 하게 된 사교반 지원입니다.
차례법문자로서 대중스님들 앞에서 어떤 얘기를 해야 할지 계속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도반스님들이 봄철 작은 별좌 소임을 산 얘기를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모든 학인스님들은 운문사에서 생활을 하는 동안 소임을 살게 됩니다. 중소임부터 경소임까지 다양한 소임들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선호하고 낯설고 어려운 일은 거부하면서 원하는 소임만을 살 수는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라 회피하고 도망간다면 자신의 좁은 틀을 조금이라도 벗어나 볼 수 있는 기회는 더욱더 요원해집니다.
소임을 산다는 건 기회입니다. 자신의 꼴을 보고 내 그릇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
물론 저도 이제까지 저에게 오는 소임을 항상 흔연히 받아들이면서 산 것은 아닙니다. 힘든 소임은 온몸과 마음으로 거부하기도 하고 운문사의 소임 결정 방식으로 지원자가 너무 많거나 아무도 지원하지 않을 때의 해결 방법 중 하나인 가위 바위 보에 어쩔 수 없이 승복해서 산 소임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동기로 그 기회가 왔든지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노력하느냐에 따라 인연들이 생겨나고, 은연중에 스스로 정한 한계를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벗어나 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소임을 산 지난 봄철은 윤달이 있어 방학까지 총 백 십일(110)의 기간이었습니다. 저는 소임을 살기 전까지 음식을 거의 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제가 200명 가까운 대중의 음식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한 철 소임을 살고 난 지금도 여전히 음식을 하려면, 미리 요리방법을 찾아 메모하고 양념은 비율에 맞춰 계량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지만 소임을 살기전의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는 이제 없어졌습니다.
소임을 사는 동안, 몸도 마음도 허한 치문의 첫 철을 허기지게 한다는 원망 아닌 원망을 듣기도 했으며 삼일 연속으로 저녁마다 면 요리를 내서 ‘면 요리 금지’를 당하기도 하는 등 긴 시간만큼이나 사건 사고도 많았습니다. 아무리 좋게 말한다 해도 결코 잘 살았다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음식을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각각 생긴 모습이 다르듯 다양한 성격과 생각, 행동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대로 보아야 하는데 제가 멋대로 정한 기준을 타인에게도 적용해 그것에서 벗어나는 언행을 하면 내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색안경을 끼고 보며 상대를 비난했습니다. 제 안의 편협하고 이기적이며 무지하기까지한 ‘나’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습니다.
소임을 사는 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갈등은 현재진행형입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모른 척 외면하며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려고 노력합니다. 소임을 살지 않았다면 나의 모난 꼴을 정면에서 마주할 기회는 오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언젠가는 주머니에서 튀어나올 송곳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지만, 나중에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상처만 남기면서 오히려 남 탓만을 하는 제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끊임없이 경계에 부딪치며 살아갑니다. 그 경계는 일 또는 사람, 환경일 수도 있으며 자기 자신의 내면의 갈등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경계로 인해 소임을 잘 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좌절하거나 자기 비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자기비하는 ‘나 잘났다’하는 마음이 그만큼의 그림자로 들어있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냉정하게 과정과 결과에 수긍하고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나를 더 풍요롭게 하고 병을 치료하는 약이 될 수도 있고, 오히려 거부하고 남 탓을 하거나 책임회피를 한다면 편협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 결과는 온전히 자신의 몫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꼴을 봐줄 수 있다면 당연히 남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내일의 나는 조금은 부처님께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길 간절히 발원하며 오늘 차례법문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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