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무엇을 보는가_효진스님

최고관리자 | 2012.11.21 14:49 | 조회 3497



무엇을 보는가

효진 /사미니과  

대중스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마음과는 달리 몸이 나이를 인정하는 치문반 효진입니다.
오늘 저는 출가자라면 끊임없이 살펴보고 챙겨서 다스려야 할 마음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운문사 하루의 시작은 늘 같습니다. 새벽 세시 도량석 소리에 일어나 예불모시고 졸린 눈을 비비며 좌선을 합니다. 마음으론 졸고 싶지 않지만, 때론 방아 찧는 몸과 머리에 놀라 깨기도 합니다. 나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졸고 싶지 않은 마음,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모두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데 행복을 느끼는 것 또한 마음입니다. ‘일체 유심조’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이지요. 그 마음을 잘 알아서 다스리고 싶지만 잘 되질 않습니다. 몸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아직도 살아내기가 버겁고 힘들지만 얻기 어렵다는 사람 몸을 받고 만나기 어렵다는 불법을 만나 늦은 나이에 이곳에서 살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저는 외할머니 49재가 인연이 되어 절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천수경을 읽던 날은 ‘수리수리 마하수리’ 정구업진언을 하며, “이거 요술 주문인데”, 라는 말로 모두를 웃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자비참기도를 처음 시작으로 삼천배 일주일 기도, 매달 삼천배기도, 1000배 100일기도, 아비라주력, 능엄주 기도, 능엄주 사경까지 그렇게 절과 기도만이 신심의 다인 줄 알았던 저는 법회를 다니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고, 수행이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수행이란 앉아서 참선하고, 화두 드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생활하면서 실천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모든 것은 변화하여 무상하므로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라는 법문을 듣고,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는데 그동안 ‘나는 무엇을 나라고 그리 애지중지 하고 살았을까’ 하는 생각에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없다는데 존재하고 있는 나는 누구이고, 일어나는 마음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기에 나이가 많다는 걱정을 뒤로하고,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리라 굳게 마음먹었지만, 그 마음은 행자 생활부터 무너져 갔습니다.

만만치 않은 행자 생활에 익숙지 않은 일들과 시간들로 지쳐갔고, 내가 생각한 출가수행은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도 나를 괴롭혔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걸, 그것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힘든 인내의 시간을 보내고, 계를 받고 운문사에서 살게 되었지만, 별로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로 짜증내고,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비판하고 외면하며 내 잘못은 생각도 않고, 남의 탓을 하기만 했습니다.

부족한 나를 인정하고 나의 모습을 돌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다스리려면 자신을 잘 주시해야 한다고 했는데 마음을 들여다보고 챙기기 보단, 마음이 일어나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두 철을 보내고 나서야 다음과 같은 글이 생각났습니다.

『 물을 대는 사람은 물길을 다스리고,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화살을 바로잡으며 목수는 나무를 다듬고, 현명한 사람은 자신을 다스린다』 부처님께서 탁발을 하기 위해 판디타라는 어린 초심의 제자와 함께 마을로 갔을 때, 판디타가 배수로를 보고,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존자여 저것은 무엇입니까?”
“배수로이다”
“사람들은 배수로를 어디에 씁니까?”
“들판에 물을 끌어대는 데에 사용한다”
“물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다”
“존자여 그러면 사람들은 마음이 없는 물을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향하도록 할 수 있습니까?”
“ 그렇다”

좀 더 가다가 그들은 화살을 만드는 사람을 보았다.

“존자여 이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화살을 만드는 사람들로서 화살을 바르게 하고 있다”
“화살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다 그것에는 마음이 없다”

좀 더 가다가 그들은 수레바퀴를 만드는 사람을 보았다

“존자여 저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저들은 나무를 구부려서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다”
“나무도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다”

그때 판디타는 생각했다.

‘이 사람들이 마음이 없는 물을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향하게하고, 마음이 없는 화살을 바르게 할 수 있고, 마음이 없는 나무를 수레바퀴로 만들 수 있다면, 왜 마음을 지닌 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조절하고 통제해서 신성한 삶을 영위하려 하지 않는가’

판디타는 이 세 가지 일을 주의 깊게 관찰한 뒤, 자신의 몸에 대해 사색하고 거기에 생각을 모으고 집중해서 통찰을 통한 명상을 완성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출가한 지 8일밖에 되지 않은 어린 사미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마음의 통제로 진리를 깨달았다.

이 글을 생각하며,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핑계 속에 게으름을 피웠는지, 신심과 용맹심이 부족했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신심이란,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신하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일상생활을 떠나서 수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챙기는 것 그것이 마음 챙김이고 수행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 있으므로, 그 마음을 단속하고, 다스려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내 안에서 어떤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지켜봐야 합니다. 짜증나면 짜증나는 대로, 화나면 화나는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번뇌가 일면 번뇌 그대로를 억제하려고 하지 말고, 무엇 때문에 라는 생각도 말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알아차리고 다스릴 수 있다면, 나라는 것도 순간의 일어남뿐이고, 실체가 없는 연기란 걸 깨달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게 바깥의 경계가 아니라 내 안으로 돌려서 항상하지 않고, 변화하는 그 마음을 주시하면, 보는 나도 없고, 일으키는 나도 없어지고, 인연 따라 생겨났다 사라지는 현상만을 볼 수 있을 때, 무상, 고, 무아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한 발짝,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마음을 내어, 판디타같은 깊은 신심으로 용맹심을 일으켜, 마음을 챙기고 다스려 보려 합니다. 모두 다 같이 마음을 잘 챙겨서 “평상심시도” 라는 그 평상심을 찾아가는 정진의 끈을 놓치지 말았으면 합니다. 끝으로 치문에 있는 대당자은법사 출가잠에 있는 글을 읽으며 법문을 마칠까합니다.

大丈夫須猛利하야 緊束身心莫容易하라
?能行願力相扶하면 決定龍華親授記하리라

“대장부여, 모름지기 맹렬하고 예리하게 해서, 몸과 마음을 긴장하고 조여서, 쉽지 않게 하라.
만일 능히 실천함과 원력이 서로서로 붙들면 결정코 용화보살이 친히 수기하리라”

감사합니다.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