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처음 마음_수월스님

가람지기 | 2010.12.29 18:16 | 조회 3872



처음 마음



  처음 마음이 그리운 계절입니다. 처음을 돌아보아야할 때 마침 기회가 되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사집반 수월입니다.

`처음 마음` 출가하기로 마음먹었을 때의 처음을 돌이켜봅니다.

감히 내 생에 스님이 되리라 상상도 못하던 제가 출가를 결심하다니 스스로에게도 매순간 놀라던, 잠들기 전이나 눈을 떠서도 `출가` 이 말이 제일로 떠올려지던 그 때가 그립습니다. 슬프게도 말입니다.

은사스님께 출가하겠다고 선포한 날! 망망대해를 다 마셔버리고 돌이라도 씹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으로 당당하게

“스님, 저 출가하겠습니다. 출가해서 반드시 도를 이뤄 저와 모든 이들을 제도하겠습니다.“

스님께선 뚝~하니 쳐다보시더니 “미친(삐리리)” 한마디 하시고선 하던 일 계속하시는 겁니다. 아무 일 없는 양 말입니다.

어안이 벙! 벙! 멍한 제게 “ 출가는 아무나 하냐? 그 복으로?!”

저의 위세는 쑥 들어가 버리고 제 자신에 대한 불안감에 주저앉아버렸습니다. 그 날 이후 스님의 자비스런 눈빛도 사라지고 냉랭함만이...

게다가 만나는 사람마다

“쟤가 출가한댄다. 스님 되는 게 쉬워 보였나봐 감히!” 하셨고 스님을 피해 다니던 저와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포기해, 포기!” 하시면서 저의 속을 들었다놓았다 하십니다. 그때마다 전 “아니요~,출~가 하~알 꺼예요” 란 모기 소리밖엔 도대체 나오질 않았습니다.

불안해하고 어쩌지 못해하는 제게 노스님께선 안경너머로 지긋하게 말씀하십니다. “ 신심가지고 욕락을 버리고 발심한 젊은이들은 자고로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않은 것을 똑똑히 분간해감서 지 갈 길을 고고~히 걸어 가야혀. ”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너무 멋있게만 들렸습니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우바리존자님의 게송이란 걸 알게 되었고 그 구절을 정확히 기억하시는 것에 놀랐습니다.

오랜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되어버린 제 마음에 시원한 소나기가 찬란한 서광과 함께 내렸습니다.

전 힘을 얻었고 스님의 `모진` 발언에도 굴하지 않고, 그 말씀 다 옳다하며 복짓기 불사를 시작했습니다.

보살도 속복도 행자도 아닌 머리 깍은 머시기로 1년 정도를 보내는 동안 전 출가만 하면, 행자만 시켜주면 무엇이든 다 받아들이고, 세상에선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발심한 출가자로 나기 위해 자신을 익혀갔습니다.

출가에 대해 고민하며 저의 자신감이 허세였음을, 함부로 할 것이 아님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촛불 아래 경전 한 구절에 감사했고, 참으로 먹는 누룽지가 꿀맛이었습니다. 가마솥 불 떼서 목욕하는 날엔 아궁이 앞에 앉아 털신을 꼬매던 행복이 있었습니다. 그 때의 제가 지금도 제게 힘이 됨을 느낍니다. 그러나, ...

이젠 아침에 일어날 때 설레 이기는커녕 하루의 시작이 감히 귀찮을 때도 있고, 누군가 싫은 소리를 하면 변명부터 앞서고 더 편하지 못한 것에 불만만 가득합니다. 절집 생활에 익숙해져버린 저를 어쩌지 못해 강원이란 새 울타리로 보내시면서 “나도 지금부터 3년 결사다. 결사 후 누가 더 나은가보자” 시며 서릿발 같은 말씀을 제 가슴에 꽂으셨습니다.

전 다시 치문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그렇게 저렇게 사집을 보냅니다.

지난 방학 때 일입니다. 강원이 다시 일상이 되어버린 전 여느 때와 같이 `난 운문사 학인이고 피곤하니 집에 가면 좀 쉬어야지` 하는 허술한 마음으로 노스님을 뵈었는데 노스님께선 서장을 떡~ 하니 펴놓으시고선 도끼눈으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새겨보라는 구절은 읽혀지지도 않고 식은 땀 흘리는 제게

“설익은 중이나 되거라 이것아!” 참으로 오랜만의 비수!!

얼굴이 새카맣게 될 정도로 고민하던 제게 이번엔 은사스님께서 나직하게

“ 수처작주 (須處作住)라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 주인공이 되어

 본 분사를 잊지 말아야지” 하셨습니다.

저도 모르는 눈물이, 참회는 아니어도 작은 반성의 눈물이 시작의 힘을 일으켰습니다. 이 곳에서 많~이. 또, 같이. 사는 재미에만 빠져있던 제게 따끔한 경책이었으니까요.

전 이제 제가 망망대해를 다 마실 수도 없고 돌도 씹을 수 없다는 걸 잘 압니다.
오만한 저를 이끄시느라 저의 노스님과 은사스님께선 늘 이렇게 방편을 마련하시고 당신들도 서슴치 않으시고 그것들을 실천하십니다.

예를 들면 하루 삼천 배 씩 하는 이십일 일 기도 같은 거 말이죠.
젊은 학인들 걱정에 저흰 엄두도 못 낼 기도를 과감히 시작하시는 것 만 봐도 정신이 확! 나니까요.그런 방편을 만날 때면 아프다고만 하는데 조금이라도 달리고 나면 그것이 힘 인줄 그제 서야 알아차립니다.

우리는 늘 시작을 합니다. 출가할 때도, 강원 올 때도, 사집일 때도 그 처음마다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흐트러지는 것도 모르고 그저 살아버립니다.전 늘 이런 시작을 하고 또, 시작과 다른 마무리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또, 다시 조금은 성숙한 시작을 해보려합니다. 조금씩 익히다보면 노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승복에 가려진 설은 중생이 아닌 진정한 수행승이 될테니까요.

대중스님 여러분!
여러분도 지금! 우리의 처음 마음으로 조금은 성숙한 시작을 다시 해 보는 건 어떨까요? 더 이상 시간이 가기 전에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거지보다 못한 제 복에 감히 삭발 염의케 하신 은사스님의 대단한 결단에 깊이 감사하고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다짐합니다.

그리고 또, ... 제가 복이 좀 생긴 것 같습니다. 이 곳 에서의 소중한 인연들이 있으니까요. 잘 표현은 안하지만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있고 반 스님들께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대중스님 여러분!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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