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차례법문_선준스님

가람지기 | 2010.12.29 18:27 | 조회 3539



  차례법문은 운문사 4년 동안 한 사림에게 주어지는 단 한 번의 기회입니다. 학인으로서 이 많은 대중스님들 앞에서 제 살림을 내 보이는 자리이니 만큼, 차례법문을 준비하면서 불성실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기회가 단 한 번밖에 없다면, 대중스님께 꼭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일까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제 경험으로 알게 된 것들을 꾸밈없이 진실 되게 전달하고 싶다면, 무엇을 말씀 드려야 할 것인지 오래 동안 깊이 생각 해봤습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운문사 최초의 외국인 학인입니다. 몰론 저 이 전에도 외국인 스님 몇 명이 운문사에서 공부했던 걸로 알고 있지만, 이 도량에서 잠깐 살다가 다른 공부를 하러 가신 그 선배님들과는 다르게 저와 현재 아랫반에 있는 외국인 후배스님 두 명은 한국 스님들과 똑같은 완전한 학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입학시험부터 시작해서 대방 생활, 강의, 울력, 소임까지 미흡하지만 한국스님들과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여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상생활에서 많은 부분들이 외국인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로, 한국 스님들에게는 이해 받기 어려운 일들로 다가가면서 서로에게 오해와 상처를 주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이 한 외국인의 경험을 통해 문화 간의 차이를 뛰어넘는 이해와 소통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한 사람의 독특한 입장과 경험 속에도 누구에게나 도움이 될 수 있는 보편의 가르침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긴 여행을 다녀보면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처음엔 낯선 타향의 땅, 문화,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지지만 나중에는 항상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내 자신이 신기하게 느껴지는 경험도 그 중 하나지요. 낯선 환경 속에서 자기 자신도 낯설어지고, 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 양면의 칼날처럼 작용함을 발견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사고는 자기가 알고 옳다고 믿었던 방식들을 외면하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예전의 익숙했던 습관들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세계의 가치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저 자신에게도,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서로를 받아들이는 일들이 훨씬 수월했겠지요. 그러나 저는 한국 승려로서 요구되는 가치들을 어느 정도 수용함으로써 얻어지는 ‘편리함’ 예를 들면 한국인과 비슷해지는 모습 때문에 덜 눈에 띄는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동시에 저 자신을 그 가치와 문화 속으로 온전히 밀어 넣지 못 함으로써 원래 제가 가지고 있던 미극의 문화와 충돌하는 것으로부터 ‘자아 상실감’ 내지는 ‘정체성 혼란’과 끊임없이 맞서야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반 스님들은 종종 저의 말투가 너무 강하고 오만하게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반 스님들을 부담스럽게 하는 저의 군인 같은 말투가 미국 사람들에게는 자신감과 리더십이 넘치는, 믿음직스러운 말투로 느껴지기 때문에 여러 번의 지적에도 저는 쉽게 그 말투를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미국인도반 스님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스님, 한국의 불교를 배우는 것이 한국인이 되는 것과는 다르잖아요?” 말투뿐만 아니라, 모든 행위와 사고방식까지도 그들에게는 너무 한국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지요.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다른 언어, 다른 문화, 다른 습관, 그리고 다른 관습, 이들 중 그 어떠한 것도 절대적으로 옳고 그르다고나, 더 우월하고 열등하다는 등의 가치를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개개의 언어와 문화 습관들이 모두 다 그것 나름대로의 가치와 특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경전에서 분별심을 버리는 것은 지혜를 향한 수행의 첫 걸음이라고 말합니다. 머리로만 읽고 외웠던 이 가르침이 이 대중 가운데에 살면서 뼈를 사무치듯이 와 닿았습니다. 운문사의 일상 속에서 저의 옛 습관과 새로운 문화의 끊임없는 갈등은 저로 하여금 분별심을 버리게 하는 아주 귀한 연습입니다. 물론 그 연습에는 엄청난 고통이 따르지만요. 하지만 업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쉽게 얻어지지 않는 것임을 알기에 오늘도 저는 이 양변의 분별을 뛰어넘는 연습을 부단히 하고 있습니다. 부디, 때때로 이상하게 비춰지는 저의 모습들도 대중스님께 좋은 수행의 연습이 되길 바랍니다, 성불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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