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최고의 행복 - 나를 비우는 일_승이스님

가람지기 | 2010.12.29 18:33 | 조회 3517



최고의 행복 - 나를 비우는 일.



우리가 살아가는 일을 가만히 살펴보면 참 많은 감정들이 우리 삶의 순간 순간을 채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쁨, 화남, 미움, 괴로움, 쓸쓸함, 외로움, 우울함, 좌절, 그리고 그냥 그러한 느낌 등 이 다양한 감정들이 쉴새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참 바쁩니다.

그런데 아까 나열했던 감정들은 아무리 가짓수가 많다하더라도 크게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즐거움, 괴로움 그리고 아무것도 아님, 즉 구사론에서 말하는 고, 락, 불고불락이 그것입니다. 이 세가지 감정은 외부 상황에 따라 갖가지 가면을 쓰고 우리 마음을 지배합니다. 이때 이 마음의 주인인 우리는 ‘그런가보다’하고 제대로 의심해보지 않고 그냥 그 마음에 따라갑니다.

어느 날 저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개학을 하고 얼마 있지않아 공양금이 들어왔습니다. 뜻밖의 공양금에 솔직히 참 기뻤습니다. 그런데 이 행복감도 잠시, 공양금을 다 나눠준 후 회계스님이 했던 한마디로 저의 행복한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내일까지 반비 내세요. 7만원”

공양금 받기 전까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행복해졌습니다. 그러나 뒤를 이은 반비 이야기로 이 행복감은 순식간에 실망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마음이 뒤바뀌는 이 때는‘순간’보다 더 빨랐습니다.

우리 마음은 이런 식으로 순식간에 변화합니다. 이 마음은 여러분들이 여기 앉아 있는 지금도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순간마다 쉼 없이 움직이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편안한 상태가 아닙니다. 이도 저도 아닌 마음 상태일 때는 마치 편안한 것처럼 보이지만 외부 상황 따라 언제나 변화 대기 중이므로 진짜 편한 것이 못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마음은 이 세 가지 느낌과 여기서 비롯되는 수가지 감정에 시달리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나’라는 기준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기준으로 고, 락, 불고불락을 구분해 느끼고, 여기에 집착합니다. 있는 사물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뭐든지 ‘나’를 붙여 생각하고 판단해버리는 고약한 습관이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문제가 시작됩니다.

해안스님께서 쓰신 금강경 소를 보면 이 ‘나’로부터 괴로움이 생기는 일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모든 괴로움은 욕망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집착으로부터 비롯되고 집착은 좋고 싫음을 분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분별하는 마음에 ‘내’가 있다.’

예를 들면 여기 이 물은 그냥 물입니다. 내가 보고 아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상관없지만, 내가 목마른 상태에서 이 물을 보면 ‘내가 마시고 싶은 물’이 되어버립니다. 내 분별심이 한 꺼풀 씌워진 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물을 마시고자 집착 합니다. 여기서 마시게 되면 즐거운 느낌을 받는 것이고, 못 마시게 되는 상황이 되면 괴로운 느낌을 받습니다. 후자의 경우 이 욕구를 해소하고자 더욱 집착하여, 결국은 갈등, 다툼, 슬픔 등 갖가지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외부경계에 따라 행복과 불행을 판단하여 스스로 쉴 새 없이 겪는 일 자체를 ‘번뇌’라고 이름 하시며 이것이 바로 괴로움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괴로운 일을 떠난 근본 마음자리를 제시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가 불성, 열반, 원각심, 청정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등으로 일컫는 최상승의 마음 자리입니다. 이곳에는‘나’의 기준이 없으므로 어떠한 느낌도 일어나지 않은 채 다만 텅텅하고 고요할 뿐입니다. 그리고 아까와 같은 행복과 불행한 느낌은 이 마음에 그려진 그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행복하기도, 괴롭기도, 또는 편안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 이 모든 것의 핵심에는 ‘나’라고 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 즉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수 억 겁을 거쳐 훈습되어진 하나의 마음현상입니다. 그러나 너무 오랜시간 이 마음으로 살다보니 우리는 이 마음이 우리 마음의 전부인 줄로 착각하는 것 뿐입니다.

‘난 이게 좋아, 싫어’,‘난 저 사람이랑 맞지 않아. 저 사람이 하는 건 다 싫어’등 무의식적인 말과 행동의 저변에는 내가 좋아하는, 싫어하는 분별심, 그 분별심으로부터 비롯하는 집착이 전제되어 있고 이것의 가장 아래에‘나’라는 생각, 즉‘아상’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수행은 이‘아상’과 여기서 비롯되는 모든 ‘집착’을 놓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금강경에서는 이 일을 하는 데에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무주상보시’를 제시합니다.‘내 것을 주고 보답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보시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더욱 쉽게 말하자면, 태양의 빛으로 꽃은 자라지만 태양은 자신이 태양이라는 의식과, 자신이 꽃을 자랄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의식이 없습니다. 불보살님들도 만물을 위해 법을 설하지만 그 마음에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해준다는’그 어떠한 의식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렵다면 생활 속에서 조금씩 습관을 바꾸어 보십시오.‘아상’이라는 것은 결국 마음습관의 현상입니다. 그러니 이 반대의 습관을 조금씩 들여보십시오. 이 물은 그냥 물로, 내가 평소 미워했던 그 사람도 단지 그 사람으로, 내가 좋아하는 이것 또한 그냥 이것으로, 나의 모든 몸과 마음에서‘내가 어떠하게 생각하는’의 기준을 떼어버리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대하는 습관을 들여 보십시오. 그 무언가를 내 기준으로 분별하고 집착하지 않는 한 그 무언가의 성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게 되고,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괴로움은 없어질 것입니다.


대중스님 여러분, 수행자인 우리의 본분은 괴로움에서 벗어남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핵심에‘나’가 있음을 기억해고 늘‘나’를 제대로 길들여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이 일에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순간의 노력이 한 겁을 좌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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