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첫인상의 發露_덕안 스님

가람지기 | 2011.04.11 16:43 | 조회 3593




첫인상의 發露

  

새해, 새 학기, 다시 첫 출발입니다.  ‘日日是好日’이라는 말이 있듯이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니만큼 매일매일이 새로운 날 아닌 것이 없지만 아직은 衆生心 속에 是非分別이 있는 우리에게는 오늘이 봄철 첫 차례법문입니다.  화엄반의 이미지도 있고 해서 첫 철의 차례법문은 어쩐지 더 부담이 가는 것 같습니다.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었는데요, 새해부터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에는 살림 밑천이 달리고,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적당치 않은 것 같아 누구에게나 쉽게 눈에 보이는 ‘첫인상’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볼까 합니다.

맨 앞에 앉아 있는 초롱초롱한 눈빛의 치문반 스님들에게 비춰지는 나의 첫인상은 어떨까 自問해 봅니다.  自答해 보니 결과가 좀 암담합니다만, 용기를 얻고자 한번 묻겠습니다.  ““저의 첫인상이 어떻습니까?””  역시, 살아가는 방법을 미리 터득하고 오셨군요.  대중스님들이 지금 보시는 것과 같이 저의 인상은 그리 좋은 편이 못 됩니다.  학교 다닐 때, 새 학년이 되면 처음 보는 친구들은 슬금슬금 제 눈치를 살피기 시작합니다.

 ““쟤 누군데 저렇게 인상이 더럽니?  한 성격 하겠는데…………””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누구를 때리지도 않았는데 왜 저를 피하는 건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기업체에 입사를 지원했었습니다.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들에 원서를 내면 서류를 보고 먼저 인터뷰 제의가 들어 옵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고 끝날 때쯤이면 꼭 연락하겠으니 기다리라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고 집에 돌아옵니다.  그러나 한번도 다시 연락이 온 경우는 없었습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몰라 한번은 인사팀에 전화를 걸어 저의 탈락 원인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한참을 망설인 인사담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조건이 출중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독단적인 인상이 결정적 요인이라고…………  출가 후에는 이런 말을 항상 듣습니다. ‘저 스님 참 강하네.’  당차다 못해 건방져 보이기 까지 한다는 저의 첫인상.  버젓이 열 막내 안에 들어가는 나이건만 하채공 소임을 나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별좌 스님의 질문을 받습니다. 

““스님, 몇 번인데 하채공을 나와요? 사람이 그렇게 없어서 중씨 측도 사나요?”” 

““저 열막낸대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별좌 스님의 표정을 보며 매번 할 말을 잊는 저였습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정랑 청소를 하게 되면 희망이 생깁니다.  ‘내생에는 이 청소 공덕으로 원만한 상호를 갖추리라.’  기도 중에서도 절 기도를 꼭 챙기게 됩니다.  ‘이 기도 공덕으로 업장을 녹여 누구에게나 호감 가는 상호를 구족 하리라.’  그러나 저의 인상은 여전히 강하고 말투는 날카로우며 몸가짐은 부담감을 주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흔히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국 UCLA의 심리학자인 Albert Merhabian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첫인상은 만난 지 4초안에 55%가 시각적 인상으로, 38%는 목소리에서 결정되며 단 7%만이 그 사람이 한 말의 내용으로 결정된다고 합니다.  4초안이라면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외국인 친구들이 자주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한국사람들은 항상 화가 나 있지?’  길에서 누군가와 우연히 눈이 마주치면 으레 웃음을 건네는 타향 사람들의 눈에 우리들의 모습은 너무나 경직되어 있고 불편해 보이나 봅니다.  그렇다면 운문사 스님들의 모습은 어떨까요?  또, 그 안에 속해 있는 개개인의 모습은 어떨까요?

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 지혜제일 사리불과 천안제일 목건련은 마승 비구의 코끼리 같은 걸음걸이와 주위를 둘러보지 않는 寂靜한 威儀를 보고 출가했습니다.  제가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도대체 그 寂靜한 威儀가 어떠했길래, 그 모습만 보고도 발심을 했을까……’ 가슴이 뛰고 환희로왔습니다.  증일 아함경에는 이러한 마승비구의 寂靜한 威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沙門의 梵行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비구의 걸음걸이와 용모, 바라보기, 거동은 법과 같아야 하며 온갖 監觀이 고요해야 한다.  눈은 色을 보아도 그것에 집착하지말아야 하며 어지럽지 않아 눈이 깨끗해져야 한다.  이렇듯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 짓는 것도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감관이 고요하고 청정해야 이것을 비구의 범행이라 한다. 


이것은 『능엄경』에서 ““만약 능히 사물을 굴릴 수 있으면 곧 여래와 같다(若能轉物 卽同如來)””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마음이 自由自在해 져서 그 어떠한 경계에도 분별하지 않고 만물을 굴리되 사물에 굴림 당하지 않으며 그 굴리는 자신마저도 잊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一切諸法에 대해 모습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적정해지지 않을까요?

겉모습은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첫인상 또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저의 마음에 我慢과 執着이 꽉 차 있고 慈悲心이 부족하며 一切 境界에 대해 끊임없이 是非를 따지다 보니 당연히 강하고 날카롭고 거친 표정과 말투와 행동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세간의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큰스님’, 또는 ‘善知識’의 모습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습은 다 다르지만 그 안색이 평온하고 맑아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함이 들어있다는 것이지요.  힘들고 빡빡한 하루하루의 일정 속에서 스스로 마음의 여유를 찾고자 누군가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요?  마음은 화가와 같아 種種의 법계를 그려내듯이 나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로의 미소가 다른 사람에게도 안정과 행복을 일궈낼 것입니다.  언젠가 달라져있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위해 다 함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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