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사과는 무슨 색일까? - 사집과 지엄

가람지기 | 2018.09.29 20:33 | 조회 1678

안녕하십니까?

사과는 무슨 색일까?’라는 주제로 차례법문을 하게 된 사집반 지엄입니다.


차례법문에 앞서 대중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대중 여러분! 사과는 무슨 색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우리는 사과가 빨간색이라는 보편적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아시다시피 사과는 빨갛게 익은 것도 있지만, 파란 햇사과, 껍질을 예쁘게 깎아 속을 노랗게 드러낸 사과도 있습니다. 만약 이 중 파란 사과만을 본 사람에게 사과가 무슨 색이냐고 물어본다면 본인이 보았던 사과의 색깔 파란색을 답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빨간 사과를 보고도 사과의 하나인 줄 모르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듯 쉽게 단정짓고 보편적인 생각의 기준으로 어떤 현상을 보는 오류를 자주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진실이 무엇인지 더 알고자 하기보다는 자신이 아는 기준범위에서만 생각하게 됩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이 말해주거나 본인이 다양하게 체험하지 않는 이상 내가 아는 일부가 전체의 일부분일 뿐이고, 내가 아는 것 외 다른 견해 다른 사실이 있다는 것조차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속담 중에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열반경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비롯됐습니다. 옛날 인도의 어떤 왕이 장님 여섯 명을 불러 손으로 코끼리를 만져 보고 각기 자기가 알고 있는 코끼리에 대해 말해 보도록 했습니다. 먼저 코끼리의 이빨(상아)을 만진 장님이 말했습니다. “폐하 코끼리는 무같이 생긴 동물입니다.” 그러자 코끼리의 귀를 만졌던 장님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폐하. 코끼리는 곡식을 까불 때 사용하는 키같이 생겼습니다.” 옆에서 코끼리의 다리를 만진 장님이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둘 다 틀렸습니다. 코끼리는 마치 커다란 절구공이같이 생긴 동물이었습니다.” 그 뒤에도 코끼리 등을 만진 이는 평상같이 생겼다고 우기고, 배를 만진 이는 코끼리가 장독같이 생겼다고 주장하며, 꼬리를 만진 이는 코끼리가 굵은 밧줄같이 생겼다고 외쳤습니다. 왕은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보아라. 코끼리는 하나이거늘, 저 여섯 장님은 제각기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을 코끼리로 알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진리를 아는 것도 이와 같다.” 이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알고 있는 만큼만 이해하고 고집하려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출가 전 저는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네모난 건물에서는 하루 종일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증명하기에 바빴습니다. 디지털 시대 무수한 변화를 매일매일 겪으며 새로운 컨텐츠를 접하며 지냈습니다. 눈앞에 있는 것을 빨리 받아들이고 익혀야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보고 있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앞에 있는 이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나의 좁은 생각으로 판단한 것을.. 그 판단으로 어떤 오류를 범하고서 그냥 지나쳤는지 생각해볼 겨를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기계적인 삶은 출가라는 길을 선택한 뒤에야 벗어날 수 있었고, 비로소 나와 내 주변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타인 혹은 자신, 그 무엇에 대해서 너무나 쉽게 단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무서운 것은 이러한 사람에게는 진실이 무엇이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눈앞에 펼쳐진 현상이나 상황이 진실을 대변하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이면 이것이 바로 진실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목격한 사람이 자신뿐만이 아니라 여러 명일 때 이 오류는 더욱 겉잡을 수 없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몰랐지만 저는 너무나 쉽게 앞에 있는 것만 보고 전체를 단정짓는 행동을 많이 해왔습니다.


사실 저는 출가 후 운문사라는 큰 대중의 구성원이 되었을 때 이곳에 대해 이상한 곳이라고 쉬이 단정지었습니다. 낯선 얼굴들, 익숙하지 않은 말투와 처음 겪어보는 규율들.. 정말이지 저는 이곳이 정말 답답했습니다. 논리적 이치에 맞지도 않고 군대보다 더 엄하고 사람을 일부러 괴롭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심시킨다는 핑계로 일부로 힘들게 하는 건가?’ 그래서 은사스님께 은사스님 만약 제가 강원을 다 졸업하지 않고 중간에 휴학이나 자퇴를 해도 될까요?’라고 여쭈었습니다. 은사스님께서는 강원이 극락이다. 지엄아 그곳에서 못견디고 나오면 너는 이 승가 속에서 제대로 스님구실 못한다. 그래도 니가 만약 정~ 힘들어서 나온다면 니 뜻대로 하는 거지만 동주도반이 있는 그곳이 극락이요, 그보다 더 좋은 곳은 없는 것만 알아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속으로 은사스님께선 봉녕사를 졸업하셔서 운문사 사정을 모르시는구나. 그냥 타이르시는 말로만 여기며 저의 괴로움을 몰라주고 공감해주지 않는 은사스님께 서운함을 느꼈습니다.


시간이 흘러 사집반이 되었고 세 번째 철, 가을입니다. 저는 은사스님께서 말씀하신 강원이 극락이라는 말씀이 왜 그런지 아직도 깊은 의미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도반이 함께하는 이곳이 왜 소중한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치문 때 마냥 미웠던 도반, 마냥 좋았던 도반.. 지금은 다 고맙고 소중한 도반입니다. 치문 때 무서웠던 상반스님 눈도 마주치기 싫었던 상반스님.. 지금은 다 고마운 저의 길잡이입니다. 저는 이제서야 느낍니다. 처음부터 쉬이 이곳이 이상한 곳이라 단정지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주어진 대로 흘러가는 대로 마음 내려 놓았더라면 저는 좀 더 좋은 도반 좋은 후배 좋은 제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또 지나온 1년 반을 더 즐거워하며 감사히 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저는 앞으로 무엇을 쉽게 단정짓는 습을 고쳐서 이 세상의 다양한 면을 고루 비추어볼 수 있는 통찰력을 기르고자 합니다. 깎아놓은 사과만 보고 난 뒤 너도 봤지? 사과는 노란색 맞지?’ ‘그래 그래 맞아’ ‘누가 사과가 빨갛대 ㅋㅋ이러한 단정짓기는 우리 본인 스스로가 인식한 대상일 뿐 인식이라는 것이 연기임을 알아차리고 집착하지 않을 때 이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본 것이 사실인가? 내가 겪은 것이 전부일까?” 에 항상 알아차림을 통한 넓은 시야를 가진 수행자가 되고자 부처님께 발원합니다.


 이제 다시 한번 질문해 보고 싶습니다. ‘대중 여러분 사과는 무슨 색일까요?’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