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불교의 구체적인 수행방법 (현서스님)

운문사 | 2005.12.26 12:52 | 조회 5491
강원 3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 동안 어록과 경전을 보면서 궁금해하던 점과 경을 보는 목적이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어떻게 닦아가라고 가르치셨을까 하는 실질적인 수행방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동안 경전을 보아오면서 느껴왔던 소견을 잠깐 피력해볼까 합니다.

요즈음의 학인들은 강원을 졸업하면 과반수 이상이 선방으로 달려갑니다. 현재 우리 나라의 선방은 간화선 위주의 화두 참선 일변도이므로 부처님의 길을 따르는 자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사마타, 비파사나, 선나, 삼마발제 등을 논하며 지관止觀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화두참구법(간화선)도 역시 止와 觀의 수행법입니다. 화두 참구에 있어서 사구死句가 아닌 활구活句가 되기 위해서는 성성惺惺과 적적寂寂이 모두 들어가야 되니 즉, 止와 觀이 모두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참선이니 사마타니 비파사나니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수행해 나아가는 형식이 조금씩 틀릴 뿐입니다.

여기서 본인이 의심을 가지게 된 점은 경전 속에서 그 동안 보아 오던 것들이 사마타나 비파사나 위주의 수행법인 듯한데 어째서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유독 간화선만을 최상의 방법으로 고집하고 있으며, 또한 사념처, 비파사나 등의 말만 들어도 소승의 한 방법일 뿐이라며 천대시하는 풍토는 무엇인가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결코 부처님으로부터 나온 가르침이 둘이라고는 생각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승과 대승은 다만 역사적인 필요에 의해서, 중생의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시절인연에 의해서 소승과 대승이라는 가지로 갈라져 나왔을 따름이지, 따지고 보면 둘이 아닙니다. 하나의 선상에서 성숙단계에 있는 흐름일 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찌 둘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중생의 근기에 따른 방편의 개시일 뿐입니다.
따라서 소승이니 대승이니 가리지 않고 모든 행법들을 편견없이 바라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길을 처음 내딛는 초심자인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수습해 나가는 방법들이 테크닉상, 그리고 근기상 배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근기의 상중하를 막론하고 화두 하나만으로 무조건 제접하는 방식보다는 각자의 근기에 맞도록 다양한 수행방법으로 접근해 가고 싶은 심정인 것입니다.
경전에서도 보면 부정관으로는 도저히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던 어느 비구에게 부처님께서는 그를 위해 숙명통으로 그의 다생 인연을 알아보시고 수행법을 달리 가르쳐 주시어 얼마가지 않아 그 비구는 아라한과를 증득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곧 근기에 따른 수행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고 있고 부처님 또한 직접 그렇게 가르치셨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간화선은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역대 조사들에 의해 새롭게 창출된 또 하나의 수행법입니다. 아마도 당시에는 출중한 근기가 많아서인지 누구나 할! 한번 지름에, 혹은 30방을 얻어맞으면 즉시에 칠통이 타파되고 막혔던 의심이 뚫어지는 등의 현상이 일어났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가르쳐 주는 선사의 할방은 수좌들의 근기를 고려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다루어지고 있고 또한 그 횟수도 매우 부족한 실정이며, 설령 방할을 만날지라도 그 즉시에 깨달음을 얻거나 수행의 진보를 얻는 근기들도 매우 부족한 것 같습니다.
현재의 우리나라 수행풍토가 여기에 이른다면 초심자를 위한 다양한 수행법의 제시는 절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화두 참구법이 굉장히 수승한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고 또 많은 역대 선지식들에 의해 이것이 증명되고 있지만, 오늘날 화두법만으로 깨달음에 증입證入해 들어가는 자는 흔하지 않은 듯합니다. 이것은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현대 근기들의 하열함에서도 큰 원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나, 이왕 그러하다면 말세의 上中下 다양한 근기들을 위해 돈頓과 점漸으로 다양하게 수행법이 제시되어 모든 근기들을 다 포섭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소승과 대승의 행법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소승의 행법으로 대표적인 것이 유부의 수도론修道論으로써 구사론의 성현품에 통합정리되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가장 먼저
① 신기청정身器淸淨의 단계가 있습니다.
계율을 지켜 행위를 바르게 하고, 조용한 장소에서 생활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며, 소욕지족에 안주하며, 다음으로 의식주에 있어서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번뇌를 끊고 성인의 도를 닦겠다는 원을 갖는 것입니다.
② 다음으로 선정의 단계인 3현의 위位입니다.
3賢이란 오정심五停心, 별상념주別相念住, 총상념주總相念住입니다.
오정심이란, 마음을 정지시키는 수행으로써 유가행의 실천입니다.
止와 觀으로 구분하면 止(samatha)에 해당됩니다.
이것에 부정관, 자비관, 인연관, 차별관, 수식관이 다섯이 있는데,
특히 부정관과 수식관이 중요시됩니다.
*부정관 - 내 몸은 피나 고름이나 똥오줌 등으로 충만해 있고 오장육부의 부정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죽으면 썩어져서 냄새가 나는 것, 즉 부정하다고 관하는 것.
*자비관 - 일상적인 모든 행위에 자비를 철저히 체계적으로 작용하도록 하는 명상법.
*인연관 - 인연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현상을 관찰.
*차별관 -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을 분석 관찰하여 집착을 끊어 가는 명상법.
*수식관 -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호흡을 헤아리는 관법으로 산란심이 많은 사람에게 마음으로
고요하게 하는 방법.
이외에도 시체관, 백골관 등 止, 즉 사마타에 관한 명상법이 많습니다.
止가 확립하면 다음으로 관觀(비파사나)에 듭니다. 현상에 대해 꿰뚫어보는 명상법으로, 바로 별상념주와 총상념주입니다. 념주란 사념처관을 말하는데, 우선 별상념주란 것은 身受心法(몸, 느낌, 마음, 법)에 대해 각각 따로 자상을 관하는 것입니다. 몸의 자상은 부정하고, 느낌의 자상은 고통이며, 마음의 자상은 무상하고, 법의 자상은 무아라고 관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총상념주란 것은, 조금전의 신수심법에 대하여 따로이 관하지 않고 넷을 합하여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공하며 무아라고 총괄적으로 관하여 닦는 것입니다.
이상을 외범위外凡位라고 하며 자량위資糧位라고 합니다.
③ 다음으로 내범위內凡位라고 불리우는 사가행위四加行位가 있습니다.
이것은 고집별도의 사성제에 대해 관하는 것인데 고제에 대해 4가지, 집제에 대해 4가지, 멸제에 대해 4가지, 도제에 대해 4가지로 각각 관하는 수행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16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4제 16행상관이라고 힙니다. 이 사제四諦에 대한 지혜를 깊게 함으로써 이해의 깊고 낮음에 따라 난위, 정위, 인위, 세제일위의 4단계로 올라가게 됩니다. 마지막 세제일위에 가서 4제를 16가지 행법으로 누차 관하고 있으면 세속지에 있어서의 최고의 깨달음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최고이기 때문에 동일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지혜는 1찰나적입니다. 이 1찰나가 지나고 나면 성인의 지혜로 들어가게 되고 견도위, 즉 道를 보는 성인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④ 가행위가 끝나고 다음 견도위見道位부터는 번뇌를 끊어 나가는 과정이 점차 미세해지는데 여기서부터는 성인의 흐름에 들어가게 되므로 예류향이 시작됩니다. 즉 견도위수도위무학위를 거쳐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과를 얻습니다. 이것은 성인의 단계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야기할 것을 생략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앞의 범부의 단계 수행법만 보아도 지금 이 자리에서 실천해야 할 실질적인 수행법을 대충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이 깊어지면 다음 단계는 저절로 이어지리라고 봅니다.


대승의 수행법으로는 기원전후로 하여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나면서 대승경전과 스투파신앙, 즉 불탑신앙이 새롭게 생겨나게 되고 이전의 소승에서 볼 수 없었던 행법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것처럼, 불탑예배나 불탑공양, 경전의 수지독송 등입니다. 그리고 밀교의 영향과 다수의 보살사상이 대두되면서 여러 가지 기도의식이 체계화되고 만트라(진언), 다라니 등이 생겨나고 또 시간이 지나면서 후대에는 참선, 염불 등 많은 행법들이 생겨납니다.


대승의 행법은 매우 다양하므로 그 중에서 대표적인 참선법과 염불에 대해 간단히 말해 보겠습니다.
① 선禪에는 공안선, 묵조선, 염불선의 3가지로 보겠습니다.
*공안선(公案禪), 화두선(話頭禪) - 화두 즉 공안을 들고 의심해가면서 나의 본질을 추구해가는
방법으로 최상승선이지만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에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지적으로 참구해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음.
*묵조선(默照禪) - 화두가 없이 그냥 앉아서 묵묵히 자기 마음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의지가 강한 사람에게 좋음.
*염불선(念佛禪) - 천지만유 우주가 바로 부처이고, 내가 바로 부처님을 느끼고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
② 염불은 칭명稱名염불, 관상觀像염불, 관상觀想염불, 실상實相염불의 네 가지로 보통 말합니다.
*稱名염불 -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는 염불.
*觀像염불 - 부처님의 원만한 덕상(자비롭고 덕을 갖춘 원만상호)을 관찰하면서 하는 염불.
*觀想염불 - 부처님의 무량공덕(공능, 공덕)을 상상하면서 하는 염불.
*實相염불 - 실상의 이치, 곧 불생불멸하고 진공묘유한 진리를 관조하는 염불.
온 우주가 그대로 광명이고, 그대로 부처임을 느끼면서 하는 염불.


이상에서 소승과 대승의 수행의 실제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총괄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소승, 즉 남방불교에서는 바로 사념처관이 대표적인 것이고, 대승, 즉 북방불교에서는 바로 참선, 기도, 염불이라고 요약될 수 있습니다. 제가 그 동안 경전을 통해 느낀 점도 결국은 바로 참선이나 명상, 기도, 염불주력 이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근기에 따라 많은 가지치기를 하고 있으니, 다양하게 참조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많은 행법들이 있지만 실제로 참구해 보면, 염불을 하다가도 몰록 화두가 들리고, 화두 가운데서도 위빠사나와 사마타가 모두 일어나리라 봅니다. 수행의 방법이 여러 가지로 나누어지는 것은 다만 겉으로 드러나는 테크닉상의 문제일 뿐이지, 사실 실참에 있어서는 사마타와 비파사나가 분리되지 못하고 염불과 참선이 나누어지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결국 이치적으로 보면, 진리가 법계를 두루하여 모든 수행법이 하나로 통합니다. 그러나 事로 볼 때는 당연히 걸림이 있으니 바로 수행의 점차와 다양한 방편들입니다. 그럼에도 소승이니 대승이니 분별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그리고 부처님의 본뜻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아닐 수 없으며, 수행력의 부족에서 오는 편협된 사고의 결실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다만 교학적 필요에 의해서 나누는 것은 필요악이지만, 우리의 마음에 있어서는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 분별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대중스님, 우리는 지금 티끌입니다. 법계 속에 있는 작은 한 티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티끌은 법계를 채우고도 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부처라는 것을 철저히 믿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런 믿음에서 출발하여 선입견이나 편벽됨이 없는 열린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대승심이 아닐까 합니다.
영화 '쿤둔'에서 나온 대사 중에 제 마음을 동하게 했던 구절로 오늘 이 자리를 마감하고 싶습니다. 마치 집을 나온 나그네가 언제나 고향을 향한 깊은 향수에 젖어 있듯이, 우리 출가사문에게도 마음의 본원을 향한 그리움이 항상 잠재해 있습니다. 이 말이 바로 그러한 나의 마음을 일깨워주는 것 같았습니다.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 붓다와 다르마와 상가에 귀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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