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절하는 공덕(무학스님)

운문사 | 2005.12.26 13:15 | 조회 4109

앞에 앉아 있는 치문반 스님들을 보니까 작년에 저희와 같이 방부를 들인 지금은 화엄반이 된 어떤스님이 차례법문 때 했던 '운문사엔 사막이 있다.' 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고개를 들면 큰일나는 줄 알았던 치문반 첫철, 땅만보고 다니다 보면 발밑에 흙밖에 안보이던 시기를 표현한 말이었는데 작년에 그 말이 왜 그리도 가슴에 와 닿았던지….

가슴속에도, 발밑에도 사막이 있었던 그 첫철이 지나고 지금은 도량내에 핀 꽃을 즐기며 주변의 산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살필 여유도 생긴, 운문사 생활에 익숙해진 사집반 무학입니다.

오늘 제가 대중스님들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새벽 예불 끝에 하는 108배나 많은 불자들이 기도로 하고 있는 절에 대한 공덕입니다. 대중스님들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오늘을 기회로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절을 하는 이유는 부처님께 예경을 올리는 것과 하심, 참회, 그리고 건전한 건강유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또 선가귀감에도 「禮拜者는 敬也요 伏也니 恭敬眞性하고 屈伏無明이니라」라는 구절로 절의 공덕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찰을 절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곳에 와서 절하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절은 우리의 무명을 깨우쳐 주신 부처님께 예의를 갖춰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행동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또 확실한 믿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확실한 믿음이란 부처님 사상을 이해하고 공부하며 그 속에 흠뻑 젖게 하고 깊이 있게 정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바세계에 오셔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중생들을 위해 진리를 설하신 부처님의 한없는 자비에 대한 감사의 표현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이란 약간의 알음알이만 있어도 아상 때문에 남에게 고개를 잘 숙이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에게 하심은 아주 중요한 덕목이지만 그것이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습니다. 자기의 아상을 내려놓고 오로지 남을 위하는 마음을 들고 절을 하다보면 어느새 마음속의 변화가 느껴질 것입니다. 온몸으로 땀을 흘리면서 내가 아닌 남이 잘되길 바라면서 아픈 무릎을 굽히는데 어찌 하심이 안되겠습니까? 참회는 과거로부터 지어온 업에 대한 참회와 미래 발원을 위한 참회가 있습니다. 절을 하다보면 평소에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망상들이 절을 하지 않을 때보다 오히려 더 많이 떠오릅니다.

참선을 할 때 초심자에게는 망상이 더 많이 느껴지는 것처럼 절할 때도 무의식 속에 있는 생각들이 의식으로 떠오르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제 경우에는 처음 삼천배를 할 때 온몸이 쑤시고, 아픈 무릎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다시는 절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절을 마치고 나서 마음을 사로잡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환희심 때문에 또다시 절을 하게 됩니다.

저희 절을 찾은 직업이 치과의사인 어떤 처사님은 남동생이 하도 절을 열심히 다녀서 도대체 뭐하는 곳인지 궁금해서 왔다며 본인도 한 번 삼천배를 해보겠다고 해서 옆에서 도반을 서주며 같이 절을 했는데 삼천배를 마치고 나서 기뻐하면서 했던 그 처사의 말이 기억에 납니다.

"스님! 절은 과학입니다!"

온갖 망상 속에서 절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과거에 자기가 행했던 잘못들이 후회되기 시작하면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가 진실로 참회하는 때입니다. 참회의 방법으로 절을 많이 하는 것이 몸과 마음으로 같이 느낄 수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미래의 꿈이 있고 희망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원대한 발원을 해야하고 이 발원은 오늘보다 발전된 모습으로의 발원이어야 합니다.

중생제도라는 원대한 발원을 한 수행자라면 그 발원을 위해 매일매일 참회를 해야 하겠습니다. 절을 하면 무릎관절이 나빠진다는 속설 때문에 절하기를 꺼려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 반대로 절을 하면 오히려 혈액순환이 잘되어 건강해집니다. 절을 많이 해서 무릎관절이 망가졌다는 소리는 아직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야 되는 참선 자세와 온몸을 굽혔다 폈다하는 절하는 자세는 서로 보완이 잘 되어서 참선하면서 생기는 몸의 불균형을 잡아준다고 합니다. 혹자는 건강을 위해서 운동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운동하는 마음속에는 참회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행하는 정신자세가 다르기 때문에 그 결과도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 있었던 사례인데 오랫동안 해인사 백련암을 다니면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과 절을 하시던 보살님이 몸에 이상을 느껴서 병원에 갔더니 폐암 말기라고 해서 3개월 밖에 못산다는 진단을 받고, 절망 끝에 평소 해오던 절이니까 부처님 앞에서 절이나 실컷 하다가 죽자고 결심하고 어느 암자를 찾았습니다. 약도 먹지 않고 그저 눈만 뜨면 법당에서 절을 했습니다. 병원에서 말한 3개월이 지나고도 여전히 살아있자 다시 그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가 X-ray를 보고 놀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며 암세포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뒤로 보살님의 신심은 더욱 깊어졌고 주위 사람들도 그것을 보고 감동받아 열심히 절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살아있는 법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부처님께 향한 절은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합니다. 부처님께 절을 할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대중스님! 정진여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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