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보살의 마음 - 사집과 석인

가람지기 | 2017.04.19 13:03 | 조회 1862

반갑습니다.

도량에 매화꽃이 만발한 봄날 차례법문을 하게 된 사집반 석인입니다.

작년 치문 겨울철은 <이산연선사 발원문><산곡거사황태사 발원문>을 통강으로 바쳤는데, 발원문을 외우다 보니 덜컥 걸리는 부분이 생겼습니다. <산곡거사황태사 발원문>을 독송하던 중 타인이 지은 잘못 - 음욕하고, 음주하고, 식육하고 그것으로 인해 지옥에 떨어져 응당 받을 고통스런 과보를 내가 대신 받겠다는 발원에 그만 충격으로 모든 것이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왠지 이런 발원문이 무의식에 새겨지게 되면 미래세에 언젠가는 꼭 실천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이 독송조차 멈추게 했습니다.

 

 

設復淫欲하고 當墮地獄하야 住火坑中하야 經無量劫이라도

一切衆生 爲淫亂故 應受苦報 我皆代受하며,

設復飮酒하고 當墮地獄하야 飮洋銅汁 經無量劫이라도

一切衆生 爲酒顚倒하야 應受苦報 我皆代受하며,

設復食肉하고 當墮地獄하야 呑熱鐵丸 經無量劫이라도

一切衆生 爲食肉故 應受苦報 我皆代受호리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보현보살,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10대원 등 대부분의 발원에서는 모든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정법을 보호하며, 대지혜를 체득하고, 광대무변한 세상에서 보살도를 실천하겠다는 그리하여 중생계를 성숙시키고, 모두들 무상정등정각을 얻기를 바란다는 발원들이었지만 일체중생의 잘못을 대신해서 받겠다는 발원은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오래 전 어느 봄날 제가 살던 아파트 공터에서 엄마와 초등학생 딸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배드민턴을 배우는 중이였고 자신의 미숙함에서 오는 짜증을 온통 엄마한테 돌리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공을 잘 주지 못해서 내가 못 쳤잖아! 엄마가 시작한다는 말도 안하고 했잖아! 엄마가..., 엄마가...” 모든 잘못을 엄마 탓으로 돌리는 그 아이의 말을 듣고 있던 저는, 문득 나 자신도 저렇게 엄마 탓을 하고, 주변 탓을 하는 말들을 속으로 끊임없이 주절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음으로 인해 저지른 잘못을 온전히 인정하고 책임지겠다는 마음을 내기까지 땀과 눈물이 뒤범벅이 된 수 많은 참회의 절들을 올렸어야 했는데, 내가 아닌 타인의 잘못을 온전히 책임지려는 마음을 내려면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의문을 갖고 <산곡거사황태사 발원문>을 읽고 또 읽다보니 처음에 들었던 거부감은 사라지고 이런 것이 바로 대승보살의 발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자료를 찾아보던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견하고 타인이 받아야할 고통의 과보를 대신 받겠다는 발원의 연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대승불교의 보살이라는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화엄경십지품에서는 발심과 동시에 보살의 초지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십지품을 계승한보살지에서는 이와는 달리 초지에 들기까지 상당한 보살행을 거쳐야 하는데, 그 예비단계인 승혜행지에 머무는 보살은 지혜의 힘이 뛰어나서 보살행에 대해 지혜로써 자주 수습하지만 완성하지는 못합니다. 그는 생계에 대한 두려움, 불명예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악취에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며, 또한 중생의 이익을 위해 해야 할 일에 힘쓰지만 자비를 완성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은 수행이 깊어짐에 따라 점점 엷어지고 마침내 승혜행지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모두 끊어지고 초지에 들어가게 됩니다. 초지에 들어가기 직전 보살은 악취 중생들의 악업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고통을 대신 받겠다는 서원을 세웁니다. 바로 이런 서원의 힘에 의해 악취에 속하는 보살 자신의 번뇌가 사라집니다. 이로써 보살은 초지에 들어가고 영원히 악취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願我以此盡未來際忍事誓願으로 根塵 淸淨하며 具足十忍하야 不由他敎하고 入一切智하며

隨順如來하사 於無盡衆生界中 現作佛事하노니...

 

오늘도 지대방에서 옆 스님과 자신의 아견과 아만, 아소와 아애를 여실히 드러내며 티격태격 말싸움을 합니다. 한 마디의 말도 지지를 않습니다. 대중 속에서 살다보니 자신의 모난 꼴이 더욱 잘 드러납니다. 얼마 전 제가 방일하게 생활 하고 있는 것을 아신 은사스님께서 엄하게 꾸짖으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 하나 스님 만들겠다고 너의 부모님이, 수많은 시주자가 힘들게 공부할 기회를 주고 있는데 네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순간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정신 차리고 한 마음 밝혀야 그분들에게도 밝음이 전해질 텐데... 다시금 흐트러진 마음을 잡아봅니다.

저와 인연 있는 모든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번민에서 벗어나 평안해지기를...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그들에게 힘이 될 수 있기를 발원해봅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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