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옷걸이 - 사집반 동호

최고관리자 | 2016.11.14 14:44 | 조회 1970

옷걸이

사집반 동호

 

안녕하십니까? 사집반 동호입니다.

고비를 한번 넘기거나 할 일을 미루지 않고 해버리면 홀가분함을 느끼게 됩니다. 저에게는 지금이 바로 그 자리인 듯 합니다. 제 법문의 제목은 옷걸이입니다.

지난 몇 해전에 지하철역을 걷다가 문득 벽에 걸린 글을 보고 멈추어 섰습니다. 글쓴이가 참 반가웠습니다. 정채봉씨의 글이었습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한테 헌 옷걸이가 한마디 하였습니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지요."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역시!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곤 집에 가서 제가 가졌던 호칭들을 쭉 적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호칭이 생겨날까?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물었습니다. 참 많은 변화를 거치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다시 옷걸이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스님까지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엔 많이 어색했는데, 지금은 꿈에서 가끔 스님인 저의 모습을 봅니다. 그래도 어색한 것이 보살님들의 인사를 받는 것입니다. 저와 안면 있는 분들도 아니고, 대부분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니 제 옷에 인사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앞에 계신 분들에 대한 존중일 테니, 저도 최대한 함께 인사를 합니다. 글쎄요. 언제쯤이면 쑥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을까요?

 

저는 자주 나무를 봅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서있으려면 어느 정도로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할까요? 막대기를 하나 세워볼까요?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고 왠만한 충격에도 서있으려면 얼마나 땅에 묻어야 할까요? 당장 삼장원 앞의 은행나무는 대체 얼마나 큰 뿌리를 가지고 있을까요? 보이는 나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늘로 뻗어가는 나무와 땅으로 내려가는 뿌리, 눈을 감고 지하세계를 상상하면 뿌리가 나무가 되어 숲을 이룬 모습이 그려집니다. 거대한 나무 하나는 위대한 설계자일 것입니다.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은 균형 감각을 가져야하고, 뿌리부터 줄기 끝까지 물을 보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뿌리와 보이는 나무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조화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너무나 잘 보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나무와 비슷합니다. 수행자는 긴장 속에 안과 밖의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장자는 자유자재한 성인의 경지를 곤과 붕에 비유했습니다. 북해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합니다. 곤은 그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곤이 새가 되면 붕이라고 하는데, 이 붕새의 넓이는 또한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날개를 펼쳐서 힘차게 날면, 그 날개는 마치 하늘 가득히 펼쳐져 있는 구름과도 같았습니다. 깊은 고요 속에 감추어진 곤은 우리의 가능성, 大機입니다. 나무에게는 뿌리이고, 우리에게는 지혜일 것입니다.

곤이 붕으로 변화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물이 깊지 않으면 그 물은 큰 배를 실어 나를 수 없고, 바람의 부피가 충분히 크지 않으면 그것은 커다란 양 날개를 실어 나를 힘이 부족하게 됩니다. 외부의 환경을 말할 것입니다. 때가 무르익을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또한 주위의 그릇이 작은 자들의 비웃음도 이겨내야 합니다. 매미와 비둘기는 붕을 비웃습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날아도 박달나무나 느릅나무에 부딪힌다. 게다가 종종 나무에도 이르지 못한 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 일쑤지. 그런데 어찌하여 붕은 구만리나 솟구쳐 남쪽으로 가는 것 일가?”

가까운 들판으로 가는 자는 세 끼 식사면 되고, 백 리 밖을 다녀올 사람은 밤새도록 쌀을 찧어 양식을 준비해야 하고, 천리를 다녀올 자는 3개월 동안의 양식을 준비해야 하는 법입니다.

구만리를 뛰어 올라 속된 세상을 초월해 걸림 없는 자유의 경지를 가려는 사람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운문사를 붕이 사는 둥지라고 생각해봅니다. 여러 가지 시련들이 바람이 되어 날개를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해봅니다. 처음 접하는 단체생활은 어디 피할 곳도 없이 거칠고 투박한 나의 모습을 드러나게 합니다. 그렇게 마구 속살을 발라 를 건져내면 좋겠는데 피하는 법만 배워 어디 조용한 곳에 를 숨겨두고 전방위로 보이는 것만 괜찮아지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자문해 봅니다. 비워야 올라갈 수 있는 길을 고집 속에 무거워져 물속만 헤매고 다니는 것은 아닌지 또한 자문해봅니다. 어쩌면 짜증내지 않고,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는 소소함이 천리를 갈 준비가 아닐까요? 이 순간에도 깨달음의 나무는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만져봅니다. 서있는 자리를 잊지 말라고 까끌까끌한 감촉이 말해줍니다. 잠깐일 수 밖에 없는 이 자리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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