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구법의 길 - 사교반 지송

최고관리자 | 2016.01.26 15:18 | 조회 2205

안녕하십니까, 전법,구법의 길이란 주제를 가지고 차례법문을 하게 된 사교반 지송입니다.

  

우리는 매일 경전과 어록을 배웁니다.

그 수많은 경전들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무엇을 의지해서 수행했을까요?

그리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번역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많은 사부대중이 부처님의 법을 알고 배우고 실천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부처님 법을 전하고 구함에 있어 자신들의 목숨과 삶을 바쳤던,

우리들이 절대 잊어선 안 되는 그 분들의 신심과 열정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신비스러운 미지의 영역, 아무나 갈 수 없었던 곳을 향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었던 용감한 선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찬란한 길을 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서양의 교역로, 실크로드인데요

이곳은 마치 처음부터 인간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듯이 겹겹이 솟아있는 산맥들과 그 사이사이에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사막들이 펼쳐져 있는 찬란하고도 슬픈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이 거칠고 척박한 길 위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사건이 있으니 그것은 불교의 전래입니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진 후 전법과 구법을 위해 왕래하는 승려들도 많아졌습니다.

전법을 위해 중국을 찾은 인도승려는 축법호, 불도징, 구마라집, 구나발다라, 보리달마 등이 있었고

구법을 위해 인도를 찾은 중국승려는 법현, 현장, 의정, 혜일 등 이외에도 많은 승려들이 오고갔습니다.

대표적인 두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구마라집과 현장입니다.

역경시대를 일반적으로 구마라집 이전은 '고역', 구마라집 이후부터 현장까지를 '구역',

현장 이후는 '신역'으로 구분합니다. 이 한역과정은 국가적인 대사업으로 천년에 걸쳐 이루어졌고

이 험난한 여정은 구마라집과 현장의 삶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역경보살인 구마라집의 어렸을적 일화가 있습니다.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그에게 "대승경전의 심오한 가르침을 중국에 널리 떨치도록 해라. 그것을 동쪽 땅에

전하는 것은 오직 너의 힘에 달려 있으나, 다만 너 자신에게만은 아무 이익이 없을 것이니 어찌할 것인가"

이에 어린 구마라집은 말했습니다. "부처님의 도리는 중생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몸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반드시 불법의 큰 교화를 널리 퍼뜨려 몽매한 세속을 깨닫게 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는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구마라집은 자신이 가게 될 길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수없는 생 동안의 원력과 발원의 힘이었을까요..

전쟁을 겪고 온갖 핍박과 감당하기 힘든 수치, 타인에 의한 굴욕적인 파계에도 자신의 원력대로

평생 역경에 매진하였습니다. 그 후 장안에서 파란만장한 천재의 삶은 끝이 나고 결국 한줌의 재가 되었지만

자신이 번역한 경전을 통해 그의 마음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구마라집으로 부터 약 200년 후 서유기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현장법사는 경전을 공부하면 할수록

이것이 진짜 불교인가 하는 의문과 의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전의 원본만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스물 일곱살에 국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무단출국을 선택하게 됩니다.

목마름과 배고픔을 넘어선 죽음의 문턱도 현장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고

50여개의 나라들을 지나 마침내 8년 만에 나란다 사원에 도착했습니다. 현장은 인도에서 범어를 완전히 익히고

이 사원에 최고 스승 이였던 계현스님에게 불법을 배운 뒤 고국의 전법을 위해 수 백개의 부처님 사리와

산스크리트 원전 그리고 불상 등을 가지고 귀국하였습니다. 돌아와서는 죽을 때까지 한역 사업에 힘썼으니

번역한 경전은 모두 751,335권에 이르렀고 그의 번역으로 한역역사에 '신역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장안에서 인도까지 왕복한 시간은 18년이며 그 거리는 자그마치 25천 킬로미터였다고 합니다.

상상이 가십니까? 굳이 비유하자면 한반도를 약 20번 이상 왕복해야하는 거리이며

그 사이사이에는 한반도의 몇 배인 사막들과 설산들이 즐비해 있는 길을 넘어 간 것입니다.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그럼 우리나라에는 누가 있었을까....

백여 년 전 우연히 둔황 천불동 깊은 곳에서 약 5만점의 희귀 고서와 보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둔황문서라 하며 이때 우리나라 최초의 여행 기행문인 왕 오천축 국전도

천년 만에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왕 오천축 국전, 이는 다섯 지방으로 나뉘었던 인도를 다녀와서 쓴 글이며 8세기 무렵, 신라에 당찬 어린 스님이 있었으니 바로 혜초가 그 저자입니다.

그 당시 15살 이였던 혜초는 중국에서 바닷길을 통하여 인도로 갔으며 인도에서 돌아올 때는 실크로드를 이용했는데 이처럼 해로와 육로로 일주한 사람은 혜초가 최초였습니다.

그가 인도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불교가 쇠퇴하였고 부처님의 성지는 폐허가 되어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혜초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불교와 힌두교, 이슬람교가 각축전을 버리던 문명의 과도기, 4년 동안의 여정을 마친 혜초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국에 머물다 오대산에서 입적하였습니다.

  

실크로드의 실제 문헌에 따르면 중국 승려 740여 명이 인도로 이 길을 걸어갔고

살아서 돌아 온 구법승은 63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전체의 8.5프로에 불과한 숫자입니다.

위험하고도 예측할 수 없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법을 위하여

그 길을 선택하셨던 많은 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을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길고 긴 시간동안 고통과 시련의 연속도 이 분들의 신심과 열정 앞에선 어떠한 장애도 되지 않았습니다.

전법과 구법이 결코 서로 다르지 않은 것임을 당신들이 걸어갔던 삶으로 여실히 보여주셨고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대승이란 무엇인지, 수행자가 어떠한 길을 가야하는지

지금까지도 절절히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길 위에서 태어나 길에서 사람을 만나 법을 베풀고 길 위에서 열반하셨습니다.

하나의 인간은 하나의 길이다여러분은 어느 길에 서계십니까? 그리고 어디 쯤 가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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