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일상에서의 바라밀행 - 사집과 원덕

가람지기 | 2017.12.02 09:52 | 조회 1650

안녕하십니까?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날이 많은 가을을 맞이하여 일상에서의 바라밀행을 주제로 차례법문을 하게 된 사집반 원덕입니다. 반갑습니다.

대승불교를 실천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보살(菩薩)은 산스크리트어로 보디사트바(bodhisattva)이며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 또는 여러 생을 거치며 선업을 닦아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위대한 사람을 뜻합니다.

보살의 수행을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저는 출가 전 불법이 무엇이인지도 모를 때에 한 인연을 통해 보살과 육바라밀행에 대해 들었습니다. 처음 보살에 대해 들었을 때 보살은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보살 마하살이 우리 각자 자신이라는 겁니다. 저는 깨닫지도 못했고 더욱이 널리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 따위는 떠 올려 본적도 없는데 말이죠. 저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한 편으로는 제가 그런 멋진 보살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보디사트바!

깨어있음을 통해 늘 세상을 초월한 고요함에 머물되 한편으로는 육바라밀의 실천을 통해 적극적으로 생사윤회 속에서 아주 작은 선행도 놓치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다. 한편으로는 늘 참된 나를 자각하고, 한편으로는 현상계에서 끊임없이 육바라밀을 굴려 쓰는 이가 보살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의 수행법으로서 육바라밀을 설하였습니다.

그것은 원시불교의 사제(四諦)와 팔정도(八正道)가 자기완성을 위한 항목만을 포함하고 있어 타인의 이익을 위하는 부분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육바라밀에는 팔정도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외에 보시와 인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시와 인욕, 이 두 가지는 대사회적인 것으로서 이타(利他)적인 대승불교의 특질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보시 바라밀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고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는 마음 그 자체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나의 입장에서 남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입장이 되어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일상의 순간순간 저만의 편안함을 원할 때 보시바라밀을 생각하면 곧 그 이기심이 사라집니다. 오백미 올리기가 귀찮을 때, 원두반 운력이 하기 싫을 때, 반장 스님 입장이 되어보면 저절로 빠른 걸음으로 오백전으로 향하게 되고, 빠르게 토시와 장갑을 착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새 좋다 싫다는 마음도 사라집니다. 오직 할 뿐...

또 도반 스님에게 서운하고 미운 마음이 들 때 그 스님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면 도반 스님이 그러할 만 하다고 이해하게 됩니다. 제가 밉고 싫은 그 마음을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이니 백지와 같은 빈 마음이 되어 다시 상대에게 서운한 마음을 되돌려 보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직 할 뿐...

인욕 바라밀은 어쩔 수 없이 참고 견뎌 노여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결과에 대해 받아들임으로 조화로움을 이루는 것입니다.

행자 시절 주변 스님들께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참아야 한다.”였습니다. 방학 때 본사로 돌아가면 어른 스님들께서는 잘 참고 강원은 꼭 졸업해야 한다.”라며 신신당부를 하십니다. 작년 운문사에 입학하여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과 알고 익혀야 하는 각종의 습의사항으로 정신없이 봄철을 보내고, 운문사의 습함과 피할 수 없는 도반 스님들의 체온을 견디며 힘겹게 여름철을 보냈습니다. 여름 방학을 지내고 가을 학기가 시작 될 때 쯤, 작년의 이맘 때입니다. 상반 스님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참 대단하다. 어떻게 참고 견디며 저기까지 갔을까?’ 졸업생 스님들에게는 이 곳 운문사를 졸업하였다는 것만으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공경의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운문사 대중 생활의 어려운 점은 소임, 운력, 도반스님, 상반스님도 아닌, 갖가지 시비분별(是非分別)을 일으키는 제 마음이었습니다. 그 시비분별의 대상 1순위는 단연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는 도반스님 이었습니다. “왜 저러나, 저렇게 해도 되나, 상식이 너무 다르다등등 도반 스님의 모습을 보면 조건 반사적으로 매우 자연스레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런 일상의 어느 날 인욕 바라밀로 비춰 본 도반 스님의 모습은 그대로가 진리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참으려는 마음이 아닌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바라본 상대는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일뿐 더 이상 시비분별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대혜 종고 선사의 서장(書藏)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숙처방교생 생처방교숙 (熟處放敎生 生處放敎熟 )’

익은 것은 설게 하고 선 것은 익게 하라.

수행의 요체는 그동안 세세생생 익혀서 익숙한 속된 습관을 버리고, 서툴고 낯선 반야지혜를 닦는

공부를 익숙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 자신에게는 어떤 것이 익숙하고 어떤 것이 낯선가요? 일상에서의 바라밀행이 낯설다면 지금부터 익어지게 하면 어떨까요? 모든 걸음의 시작은 지금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는 것입니다. 지금 한 걸음의 시작으로 우리 모두 일상에서의 바라밀행이 익어지기를 발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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