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수행자의 행복 - 사집과 여목

가람지기 | 2018.07.09 18:53 | 조회 1805

장마로 몇 일째 비가 내려 많이 습하고 무더운 여름, 수행하기 딱 좋은 날 수행자의 행복이라는 주제로 차례법문을 하게 된 여목 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대중스님들은 행복하십니까?
출가하고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출가하니 행복하니?’ 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출가를 했을까하는 안쓰러운 마음과,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염려의 마음으로 하는 질문인데 저는 대답 하지 못했습니다.

행복이 뭘까요?

먼저 법구경에 나오는 빠따짜라의 이야기부터 들려드리겠습니다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빠따짜라는 탑에 갇혀 산 라푼젤처럼 높은 탑에서 하인의 시중만 받으며 살았습니다. 예상되는 결말처럼 빠따짜라는 시중드는 하인을 사랑하게 되어 집을 나왔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가둔 부모님을 벗어나서 사랑하는 사람과 살게 되면 행복할 줄 알았을 겁니다. 그러나 가난이라는 괴로움을 맞이하고 첫 아이를 낳기도 전에 가출을 후회하며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 아이는 친정에서 낳기를 바라며 만삭의 몸으로 길을 떠났지만 폭우를 만나 길에서 노숙을 하게 되고, 그날 밤  남편은 독사에게 물려 죽고 두 아이마저 강에서 모두 잃게 됩니다. 홀로 부모님께 돌아가는데 지난 밤 폭우로 산사태가 나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하룻밤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인은 실성하여 벌거벗은 채 돌아다니다가 극적으로 부처님을 뵙게 됩니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돌아다니던 여인은 부처님이 몸을 가릴 것을 주며 부드럽고 단호한 음성으로 정신 차리라고 하자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게 되었고 몸을 가리며 부처님 앞에 엎드려 하소연했습니다. 여인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랜 세월 윤회하며 그대가 부모와 형제, 남편, 자식, 그리고 사랑하는 친지들을 잃은 슬픔으로 흘린 눈물은 이 강보다도 많다. 빠따짜라여 걱정하지 말라. 너는 이제 보호해 줄 수 있고 인도해 줄 수 있는 곳에 이르렀느니라.
그대가 바로 그대 자신의 안식처이고 그대 자신의 피난처이며 그대 자신의 귀의처이니라.
이미 세상을 떠나 버린 사람에 대해서 지나치게 생각지 말라. 그보다 스스로 좀 더 깨어 있도록 노력하며, 청정한 마음으로 열반에 이르도록 정진해야 한다.”
여인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삶의 무상함을 깨닫고 출가하여 고통스러워하는 여인들을 바른 법으로 이끄는 비구니 행복을 실천한다는 뜻을 가진 빠따짜라가 되었다고 합니다.

행복하려고 애쓸수록 고통이 늘기만 했던 여인 그리고 부처님을 뵙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된 비구니를 기억하며 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학창시절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하나 있었는데 독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소위 국민 소원, 아니 인류의 소원인 ‘행복하게 살고 싶다.’ 였습니다. 식상하죠? 그런데 제가 꿈꾸는 행복은 특정적인 어떤 모습은 아니고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행복”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절대적인 행복을 찾기 위해 나선 길에는 부처님이 기다리고 있었고 선뜻 법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면 당장 행복할 줄 알았는데 점점 더 큰 괴로움이 다가왔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저를 맞이하고 함께 법문 듣는 사람들이 저에게 ‘법문 들으니 너무 예뻐졌다, 좋아 보인다.’ 하면서 볼 때마다 칭찬을 하고 서로 작은 것도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것이 거슬렸습니다. 제 눈에는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위선적으로 보였을까요? 저는 속으로 ‘법문 듣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 위선이야, 가식이야, 진실 되지 못한 사람들...’하면서 밀어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제 모습만 점점 더 어둡게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이 미워지고 여기저기 헐뜯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자존심 때문에 겉으로는 안 그런 척 까지 해야 했습니다.
스스로 비춰지는 제 모습이 유치하고 추하게 느껴지니 더 힘들었습니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그만 하고 싶었습니다. 눈이 문제면 눈을 없애고 마음이 문제면 마음을 없애버리고 싶을 때 쯤 법당 부처님 앞에 앉아 헤쳐 나올 길이 보이지 않아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빠따짜라와 같이 이전에 가졌던 불만족, 불안함은 부모님 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 쉽게 부모님을 탓하며 독립만 하면 행복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새롭게 만나는 괴로움들은 누구 탓도 할 수 없이 그저 마냥 피만 철철 흘려야하는 비참한 괴로움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전에는 법문 듣는 제 마음 속엔 이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처님과 생각이 통하는 거 같으면 ‘부처님 말씀이 맞지. 부처님처럼 생각 좀 해보니 좋네.’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나오면 ‘그건 부처님이니까 가능한 거지. 난 못해.’ 마음이 힘들어지면 ‘부처님은 대단한 분이시니 방법 좀 알려주세요. 좀 해 볼게요.’ 하는 적당이 또는 남이야기처럼 듣는 마음 자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벽에 부딪힌 저는 부처님을 향해 ‘항복’이 절로 외쳐졌습니다.
그리고는 제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내가 밝아지고 싶은 거지?’, ‘사랑스러운 존재이고 싶은 거지?,’ ‘그래 해보자.’ 지옥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 했으니 스스로 광명인 줄 알면 어둠은 사라진다했고, 내가 변화면 세상은 바뀐다는 법문이 번쩍했습니다.
처음은 낯간지럽고 잘 안되지만 누군가를 칭찬하게 되고 고마움도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매우 어색하고 낯설게 저의 삶에 새로운 길이 열리기 시작했고 그 길은 새로운 삶으로 안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길에서 만난 분들은 나를 괴롭히는 분들이 아닌 존재만으로도 매우 감사한 분들이었습니다.
제가 법당에 앉아 펑펑 울었던 그때가 마치 빠따짜라가 부처님을 만났을 때 엎어진 심정과 같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나라고 하는 고집을 내려놓고 나서야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행복을 이야기하며 불행을 자초하고, 움직일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고 머리로만 헤아리며 법문 듣는 저에게 빠따짜라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처럼
불안보다는 안심을, 현재 내가 처해있는 상황을 조건 없이 그대로 보고 수용해야함을, 세상의 수많은 존재로부터 공양 받는 삶이기에 감사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새삼 돌이켜보니 나를 기준으로 나만을 위한 절대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나라는 기준을 고집하는데 절대적일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진리를 따르는 수행자에는 나를 내세우는 구함이 더 이상 없습니다. 구함이 없는 행복이야말로 절대적인 행복이고 그 행복은 전적으로 누릴 줄 아는 사람의 몫으로 빠따짜라처럼, 보현보살이 행원을 발원하고 실천하듯 실천함으로써 주어지는 행복이었습니다.
저로써는 받기 어려운 훨씬 많은 복을 누리고 살고 있으면서도 당당하게 행복하다 답하지 못한다면 수행자의 행복을 잊고 잘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지 스스로 점검 해볼 때가 아닐까 합니다. ^^
많은 존재의 공양 덕분에 살려지는 은혜로운 삶입니다. 고맙습니다.
항상 잊지 않겠습니다.
도반 스님들과 함께 이렇게 행복한 여정을 잘 살아가며 기쁘게 회향할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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