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와서 보라, 지금 여기-사집반 연담

가람지기 | 2025.08.01 21:59 | 조회 103

 

  안녕하십니까사집반 연담입니다. 여러 어른스님들과 대중들 앞에서 법문이라는 것을 하기가 어렵게 느껴져, 대상을 불교공부를 시작하는 초심자들로 하였습니다. 하량下諒하여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영화 좋아하십니까? 제가 몇 해 전 인상 깊게 본 영화가 있어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프랑스 영화인데요처음부터 끝까지 한 공간에서 한 명의 주인공이 겪는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시작은캡슐같은 공간 속에서 한 여성이 괴롭게 깨어납니다그녀는 여기가 어딘지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 때캡슐을 관리하는 AI의 목소리가 들려와여기는 우주 공간이며 동면 상태에서 어떤 목적지로 가던 중 오류가 나서 깨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주인공은 파편적인 기억들만 떠오르고 왜 여기에 있는지는 알 수 없는데, AI를 통해 지구와 연결해 결국 자신의 연고자를 찾아 연락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상대방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나야.” 주인공이자신의 DNA와 기억을 복제해 만들어진 자신이라는 것입니다이 이야기를 들은 주인공은 혼란스러워 합니다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실제로는 방금 태어난 사람이지만살아온 기억과 취향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이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까요잠시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여기'라는 말을 잘 아시지요. '마음은 항상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걱정을 하느라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구체적인 생각들을 하지 않아도지금 여기를 명확하게 경험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커피 한 잔을 마신다고 해보죠여러분은 그 커피의 맛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느낄 수 있을까요여러분이 이미 가지고 있는 수많은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자동으로 순식간에 비교하고 판단하고 평가합니다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온전히 존재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위빳사나 수행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수행입니다.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나도 모르게 과거에 머물러 있는 마음에 영향을 받지 않고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경험하는 것이 위빳사나입니다다만밖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접촉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 안을몸과 마음을 보는 것이고깊고 미세하게 관찰을 하게 되면 조건따라 생멸하는 ‘물질과 정신작용을 보며 나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럼 그것을 아는보고 있는항상 하는 이건 뭐지?’라는 의문이 나옵니다

" ‘내가 관찰하고 있다라든가, ‘관찰하는 것은 나의 행위이다라는 등으로, ‘새기고 있는 개 인주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집착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면그러한 수행자의 관찰은  ‘그러한 잘못된 생각집착사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아직 사견버림이라고 말할 수 없 다."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나오는 내용입니다자칫 그것을 자아라고 여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그럼 뭐겠습니까이 뭐꼬가 되지요. 그래서 화두선은 바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초기불교 수행과 대승의 수행이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다

화두를 하면 또 어떻습니까의정이 강하면생활하면서 자잘한 분별들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화두 한다면서 뭐가 어떻고 머리로 분석하고 따지는 사람은 공부 안 하는 사람입니다뭘 먹는지 그런 거 중요하지도 않습니다밥 있으면 그냥 먹는 거예요잠을 자면 푸른 잉크 같고잠 속에서도 맑게 깨어서 계속 보고 있습니다뭐가 뭐를 볼까요내가 뭐를 깨달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그럼 둘입니다동념즉괴動念卽乖.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어그러진 것이다이게 둘이 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초기불교 수행을 하든 간화선을 하든휴심식념休心息念. 마음을 쉬고 생각을 그쳐 지금 태어난 것처럼새롭게 순간 순간 지금 여기를 온전히 경험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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