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사집반 연담입니다. 여러 어른스님들과 대중들 앞에서 법문이라는 것을 하기가 어렵게 느껴져, 대상을 불교공부를 시작하는 초심자들로 하였습니다. 하량下諒하여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 영화 좋아하십니까? 제가 몇 해 전 인상 깊게 본 영화가 있어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프랑스 영화인데요. 처음부터 끝까지 한 공간에서 한 명의 주인공이 겪는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시작은, 캡슐같은 공간 속에서 한 여성이 괴롭게 깨어납니다. 그녀는 여기가 어딘지,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 때, 캡슐을 관리하는 AI의 목소리가 들려와, 여기는 우주 공간이며 동면 상태에서 어떤 목적지로 가던 중 오류가 나서 깨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주인공은 파편적인 기억들만 떠오르고 왜 여기에 있는지는 알 수 없는데, AI를 통해 지구와 연결해 결국 자신의 연고자를 찾아 연락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상대방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나야.” 주인공이, 자신의 DNA와 기억을 복제해 만들어진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주인공은 혼란스러워 합니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실제로는 방금 태어난 사람이지만, 살아온 기억과 취향,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까요? 잠시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여기'라는 말을 잘 아시지요. '마음은 항상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걱정을 하느라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구체적인 생각들을 하지 않아도, 지금 여기를 명확하게 경험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신다고 해보죠. 여러분은 그 커피의 맛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느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이미 가지고 있는 수많은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동으로 순식간에 비교하고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온전히 존재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위빳사나 수행’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수행입니다.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나도 모르게 과거에 머물러 있는 마음에 영향을 받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경험하는 것이 위빳사나입니다. 다만, 밖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접촉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 안을, 몸과 마음을 보는 것이고, 깊고 미세하게 관찰을 하게 되면 조건따라 생멸하는 ‘물질과 정신작용’을 보며 나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럼 그것을 아는, 보고 있는, 항상 하는 이건 뭐지?’라는 의문이 나옵니다.
" ‘내가 관찰하고 있다’라든가, ‘관찰하는 것은 나의 행위이다’라는 등으로, ‘새기고 있는 개 인, 주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집착’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면, 그러한 수행자의 관찰은 ‘그러한 잘못된 생각, 집착, 사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사견버림이라고 말할 수 없 다."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자칫 그것을 자아라고 여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 뭐겠습니까? 이 뭐꼬가 되지요. 그래서 화두선은 바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초기불교 수행과 대승의 수행이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다.
화두를 하면 또 어떻습니까. 의정이 강하면, 생활하면서 자잘한 분별들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화두 한다면서 뭐가 어떻고 머리로 분석하고 따지는 사람은 공부 안 하는 사람입니다. 뭘 먹는지 그런 거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밥 있으면 그냥 먹는 거예요. 잠을 자면 푸른 잉크 같고, 잠 속에서도 맑게 깨어서 계속 보고 있습니다. 뭐가 뭐를 볼까요. 내가 뭐를 깨달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럼 둘입니다. 동념즉괴動念卽乖.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어그러진 것이다. 이게 둘이 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초기불교 수행을 하든 간화선을 하든, 휴심식념休心息念. 마음을 쉬고 생각을 그쳐 지금 태어난 것처럼, 새롭게 순간 순간 지금 여기를 온전히 경험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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