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스님은 한국불교 자랑
반세기 동안 2천여 졸업생 배출
국제화 발맞춰 영어교육 강화
한국 비구니승단은 세계 최대를 자랑한다. 수에서도 과히 세계 최고이며 질적으로도 가장 우수하다. 달라이라마가 남방의 비구니 승단을 다시 일으키는데 한국이 나서야한다고 부탁할 정도로 성장했다. 오늘날 세계 최대 최고의 비구니 승단을 만든 동력은 교육이다. 한국사회는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을 가르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의 승가는 달랐다. 일제강점기부터 비구니 스님 교육을 외면하지 않았다. 우수한 비구니 스님들도 많았다. 물론 여건은 몹시 열악했다. 공부할 곳도 마땅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환경도 열악했다. 낮에는 일하며 먹을거리를 스스로 마련하고 밤에는 공부해야했다. 전쟁이 끝나고 한국 비구니 승단은 정말 진심으로 수행하고 공부하고 가람을 일궈왔다. 그리고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 온 몸을 다해 매진했다.
그 중심에 선 도량이 청도 운문사와 운문사승가대학이다. 그리고 운문사와 운문사승가대학은 명성(星)스님과 동일체다. 운문사가 명성스님이고 명성스님이 운문사다. 이곳을 거쳐 간 수행자들은 명성스님의 분신이며 한 명 한 명이 바로 운문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법계명성(法界明星)스님의 수행이력과 사상, 교육관을 아는 것이 바로 운문사승가대학의 본질이요 한국비구니 승가교육의 미래이기도 하다.
1964년 조계종이 현대식 학문을 갖춘 스님들을 양성하기 위해 종비생제도를 만들 때 이미 동국대 불교대학에서 수학했던 비구니 스님이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하다 23세에 출가하여 명민한 머리로 관응 경봉 명봉 운허 탄허 만우 성능 등 당대 최고의 강백들로부터 내전(內典)을 섭렵하고 강사로 학인들을 양성하던 교수면서 다시 현대학문을 배우기 위해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한 명성스님이다.
‘확고한 사상을 심어 바른 삶으로 인도하는 인천의 사표가 되기 위해서는 수행력으로나 지식으로나 떨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스님들은 반드시 절에서 공부하는 내전과 일반대학에서 배우는 외전을 겸학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이미 내전에서는 강사의 위치에 올랐으면서도 불교학과에 입학했던 명성스님은 비구니가 대학교육을 받는 것도 흔치 않던 시절 ‘초능변식의 연구’로 석사학위까지 취득했다. 김동화 박사가 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칠 것을 강권했다. 그 누구도 뿌리치기 힘든 역사적인 청이었다. ‘한국 최초 비구니 교수’ 였다.
그러나 명성스님은 단호히 거부했다. 운문사로 내려가겠다고 했다. 그 역시 의미 있는 불사였다. 김동화 박사는 “서울에서 낮잠을 자는 것이 시골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낫다”며 다시 한 번 권했다. 명성스님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동국대에서 가르칠 사람은 얼마든지 있고, 비구니 승가교육이 보다 비중이 크다”며 끝내 뿌리쳤다.
장벽은 또 있었다. 명성스님이 10년간 강사로 있던 청룡사에서 스님을 놓아주지 않았다. 노스님은 명성스님이 고집을 꺾지 않자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나 6개월간 강사도 없는 첩첩산중 절을 지키며 떠나지 않고 새로운 강사 스님만을 기다리는 후배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최초의 비구니 교수도, 재정 넉넉한 안정된 서울의 강사자리도 비구니 교육의 열정을 꺾지 못했다.
1970년 청룡사 학인 20명을 데리고 운문사 강사로 부임했다. 비구니 승가교육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그 때의 결심이 한국불교의 현대사를 바꿀 정도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선택이라고는 스님조차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1958년 개교한 운문사승가대학은 지금까지 52회 졸업생 1932명을 배출했으며, 강사를 양성하기 위해 1997년 최초의 비구니 승가대학원으로 설립한 운문사승가대학원이 9회 졸업생 18명, 2008년 계율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설립한 보현율원 11명, 불교한문 경전 해석 능력을 갖추기 위해 설립한 한문불전대학원 4회 졸업생 22명 등 1933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이들은 지금 대학 교수, 복지관 관장, 조각가, 한지전문가, 화가, 호스피스, 선원장, 가람수호 등 불교 전 분야에 걸쳐 활약하며 독일 미국 중국 등 세계 각국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전파하고 한국불교 발전과 사람들을 위해 기여하고 있다. 명성스님이 ‘최초의 비구니 교수직’을 버린 그 날의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다.
하지만 1970년 당시는 너무나 어려웠다. 스님이 서울에서 강사를 하며 동국대를 다니는 동안 운문사는 강주 묘엄스님이 강사로 있다가 선방으로 간 뒤 한동안 강사가 없어 강원이 폐지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재정이나 교육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큰 방에는 사미니 사집과 사교과 세반이 같이 살아야했고, 지대방에는 화엄반이 살았다. 전기도 없고 램프 켜고 공부했다. 겨울 한철은 오로지 시래기 국만 먹었고, 고추장은 구경도 못했다. 김치는 귀한데다 너무 짰다. 법정스님이 이렇게 짠 김치를 학인들이 먹는다며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비구니 교육도량이었지만 먹을거리는 물론 모두 자급자족하는 생활이었다. 따라서 울력이 많았다. 새벽과 저녁 시간외에는 공부할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불사하며 비구니 스님들이 기와를 직접 올리고 내렸으며 일꾼 부릴 돈이 없어 흙도 스님들이 직접 져다 올렸다. 농사철이면 종일 논에서 지내고 겨울에 불나면 불 끄러 다니고 그래서 다들 운문사농과대학이라고 불렀다. 그래도 스님들은 백장회해 선사의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을 수행자 삶으로 당연시 하며 불평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분은 어디까지나 공부였다. 그 어려운 사정 속에서도 공부는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경공부나 주력 참선 일도 모두 수행이라는 명성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치열하게 공부했다.
그토록 어렵고 힘든 운문사승가대학이지만 운문사는 출가자가 급격히 줄어든 지금도 종단에서 정원을 제한해야할 정도로 인기다.
이 모든 중심에는 명성스님이 있다. 스님은 공부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공부하는 제자들과 후배들의 학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장학회까지 결성했다. 틈틈이 쓴 붓글씨로 두 번의 전시회를 열어 1차 전시회 수익금으로는 법계장학금을, 2차 전시회 수익금으로는 전국비구니회장 시절에 ‘법륜비구니장학회’를 만들었다. 법계장학회는 8명에게 300만원씩, 법륜비구니장학회는 500만원씩 지급한다.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인재양성을 위해서다. 장학회를 통한 장학금 보다 연구비를 모아서 개인적으로 지원하는 장학금이 더 많을 정도로 스님의 인재 양성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다.
스님은 1977년 운문사 주지를 맡고 난 뒤에는 가람을 일신했다. 20년 3개월 재직 기간동안 주지와 학장을 겸하면서 40동의 건물을 신축하고 10동을 보수했다. 역사에 남을 운문사 중창주로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것이다. 그 같은 엄청난 불사를 하면서 후학을 기르는 교육불사를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고 불사금 마련하느라 방학 때면 강사들과 함께 큰 절을 다니며 권선하였으며 개인과 단체에 장학금과 기금을 내고 지역에 홍수가 나면 이웃을 도왔다. 스님의 이러한 끝없고 지극한 행(行)은 ‘즉사이진’(卽事而眞) ‘모든 크고 작은 일에 진실하라, 참되라, 성실하라’는 스님의 철학 생활신조에서 나온다. 선용기심(善用其心), 마음을 쓰되 좋은 마음을 쓰라는 가르침도 내린다. 유한마음 자비로운 마음 등 좋은 마음을 쓰는 것이 부처님이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1970년대나 지금이나 스님의 사상과 실천행은 그대로이지만 세상의 변화에 따라 운문사 승가대학도 점차 달라져가고 있다. 과거부터 외전을 강조하며 다양한 커리큘럼을 갖춘 운문사승가대학이지만 영어를 특히 강조한다. 전 세계에서 한국불교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수행자를 양성하기 위해 어학실력을 향상하는데 심혈을 기울이며 피아노 요가 글씨 등 문화적 소양을 기르는데도 힘쓴다. ‘농대’라고 불릴 정도로 일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인근 주민들이 농사를 많이 도와 스님들은 학업에 더 열중할 수 있게 됐다.
운문사와 운문사승가대학 그리고 명성스님을 운문사 스님들은 당신들의 독차지로 여기지 않는다. 명성스님이 개인이 아니듯 운문사만의 스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6000여명 전 비구니 스님들 중 3분의 1을 배출한 운문사는 한국비구니를 대표한다는 긍지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명성스님은 한국비구니스님을 대표하는 한국불교의 긍지이며 자랑이다.
문수선원
결제 때 전국각지 수좌 입방
운문사는 18세기에 유정의 교파와 언기의 선파를 통합한 설송 연초스님이 주석한 이래 선교양종을 아우르는 수행도량으로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2003년 제14대 주지 흥륜스님 때 승가대학장인 명성스님의 원력으로 264㎡(80평) 규모의 ㄷ자형 모양의 선원을 개원했다. 당시 명성스님이 선원 이름을 직접 문수선원(文殊禪院)이라 짓고 현판을 썼다. 중생을 널리 제도할 문수보살의 지혜를 배우고 닦는 곳이라는 의미다. 운문사승가대학이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는 교의 바다(敎海)라면 문수선원은 부처님 마음을 파악하기 위해 수행하는 선의 숲(禪林)인 셈이다.
‘선시불심 교시불어 율시수행(禪是佛心 敎是佛語 律是修行)’이라는 명성스님의 원력에 따라 보현율원과 함께 운문사는 선교율을 갖춘 총림의 체제를 갖추었다. 문수선원에는 결제 때면 전국 각지에서 20여명의 수좌들이 모여든다.
사리암
나반존자 기도처로 명성 자자
운문사는 모두 자급자족하며 사리암에서 나오는 기도비로 재정을 충당한다. 운문사 남동쪽에 자리한 사리암은 나반존자 기도처로 유명하다. 입구 케이블카가 있는 다리에서부터 약 1000보를 올라온 층암 절벽위에 세운 암자이다.
930년 보양선사가 창건하고, 1845년 정암당 효원스님이 중창했다. 1977년 비구니 혜은스님이 13년간 살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십시일반 협조해서 불사를 해 오늘에 이른다. 1978년 전기불사를 시작으로 1980년 전 부산거사림회 회장 이인희 거사의 후원으로 3층 요사를 신축하고 관음전 자인실 정랑 등을 개축했다. 천태각 뒤편에는 산신각이 있고, 왼편에 굴이 하나 있다. 이 굴 안쪽에 샘이 있다.
사리암은 나반존자 기도처로 이름이 난 까닭에 지금도 소원을 빌려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수목원
한국 사찰 유일 보석 같은 존재
대웅보전 뒤편 수목원 화랑동산과 보리수수목원은 한국 사찰 유일의 수목원이다. 화랑동산은 보리밭으로 보리수수목원은 마을집들이 있던 곳인데 재정비를 하면서 조성된 수목원이다. 수백종의 나무와 식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2008년 명성스님이 동산을 만들고 계절 따라 피는 각종 꽃과 나무를 심어 조성했다. 학인스님들의 학업과 수행정진을 돕기 위해 만들었는데 야생화처럼 어려움 속에서도 꽃을 피워 평생 수행하고 전법하라는 당부가 들어있다.
구절초를 비롯하여 붓꽃 꽈리 작약 할미꽃 옥잠화 같은 우리 야생화를 꽃모양과 색깔 개화 시기가 서로 다른 종을 심어 계절별로 다양한 야생화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신라 화랑오계를 새긴 비석과 그림도 조성돼 있어 옛 운문사의 내력을 엿볼 수 있다. 명성스님은 “수목원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니 나도 기쁘다”며 즐거워했다.
명성스님 수행 발자취와 이력 |
외전 1948년 강릉여고 졸업, 1964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1970년 동국대 불교대학 대학원 졸업 석사학위 취득, 1974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98년 동국대불교학과 철학박사 학위 취득, 2008년 태국마하출라롱콘라자위달라야대학 명예박사학위 내전 및 수행 경력 사항 1949년 3월 강릉 강동초등학교 교사 취임 1952년 4월16일 해인사에서 선행스님을 은사로 득도 1952년 4월24일 해인사에서 동산화상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8년 2월15일 순천 선암사 강원 대교과 졸업 1958년 4월15일 선암사 강원에서 성능스님으로부터 전강. 다음날부터 강사 취임 1961년 2월10일~1970년 서울 청룡사 강원 강사 역임 1966년 9월23일 해인사 감로계단에서 자운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8년 9월19일 서울 청룡사 천화계단에서 자운화상 계사로 보살계 수지 1970년 9월 대한불교조계종 제3대 중앙종회의원 피선 1970년 11월15일 청도 운문사 승가학원 강사로 취임 1974년 8월 대한불교조계종 제4대 중앙종회의원 피선 1975년 7월 세계불교도우의회 한국이사로 위촉 1975년 12월 ~1976년6월 원시불교연구차 동남아시아 불교국 순방, 유럽 미국 등 순방 1977년 7월14일~1998년 10월8일 운문사 주지 취임(불교정화 이후 제8~12대) 1978년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중앙종회의원 피선 1980년 비구니 별소계단 갈마아사리 및 교수 아사리 1984년 8월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중앙종회의원 피선 1987년 1월10일 운문사 승가학원이 운문사승가대학원으로 승격됨에 따라 학장으로 취임 1988년 경북대 사범대학 국민윤리학과 외래강사 1989년 대한불교조계종 제9대 중앙종회의원 피선 1989년 대한불교조계종 전국비구니회 부회장 1989년 목동청소년회관 및 양천체육관 운영위원장 1993년 세계종교지도자 대회 (시카고) 참석 1995년 국제난민돕기 캄보디아 태국 방문 1997년 9월 운문사승가대학원 신설로 대학원장 취임 2001년 6월 동국대총동창회 부회장 임명 2001년 9월 대한불교조계종 구족계화상 전계사 위촉 2001~2003년 구족계 별소계단 전계화상 2003년 조계종전국비구니회장 취임 2004년 6월~2004년 7월 세계여성불자대회에서 회장 역임 2007년 10월 대한불교조계종전국비구니회 회장 재취임 2007년 10월23일 명사 법계 품서 2012년 1월~현재 운문사 회주 겸 운문사 한문불전대학원장 <著書> ‘초능변식의 연구’(初能變識의 硏究), ‘삼능변식의 연구’(三陵變識의 硏究), ‘불교학논문집’, ‘법계명성회갑기념논문집’. <編書> ‘제경서문’(諸經序文), ‘사미니율의’, <譯書> ‘구사론대강’(俱舍論大綱), ‘유식강요’(唯識講要), ‘아비달마순정이론’(阿毘達磨順正理論) (한글대장경 348권 中) <상훈> 1966년 대한민국미술전에서 서예부문 입선 동국대학교 서예전 총장상 1991년 제4회 조계종포교대상 공로상 수상 2000년 환경부 장관 특별공로상 수상 2004년 일맥재단 사회봉사상 수상 2005년 동다송문화원 장수다인상 수상 2008년 유엔 국제여성의 날 행사 탁월한 불교여성상 수상 |
[불교신문3171호/2016년1월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