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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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욕·용서·원칙으로 배움의 길 열어준 비구니 교육 변혁의 축 법보신문2016. 1. 20

가람지기 | 2016.01.24 14:20 | 조회 3439

 
▲ 올해 세납 87세인 명성 스님은 요즘도 변함없이 경을 펼친다. 붓을 잡은 단정한 손과 꼿꼿한 붓끝은 스님의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호거산은 글자 그대로 호랑이가 머무는 산이다. 형세가 웅크리고 앉은 호랑이 같다. 그 호랑이 머리가 향한 곳이 바로 운문사다. 북동쪽에 호거산을 두고 자리한 운문사는 호랑이 앞에 앉은 형상이다. 전각들이 남향으로 배치돼 있는 덕에 호랑이를 등 뒤에 두고 앉아 있는 셈이다. 어미 호랑에 품에 안긴 새끼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한 순간이라도 정신을 놓는다면 한 입에 물릴 터다. 밤낮으로 눈 부릅떠야 하는 곳이 운문사다. 소소한 풍수일지 모르지만 이런 우연조차 운문사서 눈푸른 수행자들이 수없이 배출되는 이유를 한 몫 거들고 나설 만큼 운문사는 많은 수행자들의 고향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새끼 호랑이를 키우는 어미가 있다.

교사 그만두고 23세에 출가
관응·운허·탄허 스님 가르침
비구니 대강백 출현의 불연

20대 후반 조계사 대웅전서
일타·청담·동산 스님 앞 법문
“든든했다”는 남다른 면모도

1970년 운문사와 첫 인연
외국어 등 외전 강의 선구
“수행은 당연히 으뜸이고
세상 지식도 더 잘 알아야”

운문사 가람 일신 시키고
비구니 교육도량으로 일궈

어미 호랑이는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1957년 스물여덟 나이에 조계사 대웅전서 법문했다. 일타 스님, 청담 스님, 동산 스님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큰스님들 앞에서였다. 지금도 비구니가 비구 앞에 법문하는 일이 희귀한데 그 시절, 그것도 조계사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당당하다.
“떨리기는요. 후광처럼 든든했어요.”
법계 명성 스님은 그때부터 호랑이였나 보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울창한 솔숲을 지나면 운문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 높은 산 아래 골짜기에 어떻게 이런 평지가 있을까 싶을 만큼 고르고 넓은 땅에 도량이 앉아있다. 북동쪽의 호거산을 포함해 남쪽 운문산, 서쪽 억산으로 이어지는 크고 작은 봉우리와 능선들이 감싸고 있는 도량은 그래서 곧잘 연꽃에 비유되곤 한다. 명성 스님은 이곳 운문사의 회주이자 운문사 한문불전대학원장이다. 올해 세수 87세이지만 여전히 후학들을 지도하는 ‘현역 스승’이다.

명성 스님을 만나러 가는 날은 마침 운문사 대표 기도수행 가운데 하나인 ‘오백나한님과 함께 하는 100일간의 수행’ 회향 날이다. 회향기도를 마치고 법상에 오른 명성 스님의 법문은 세납을 무색케 할 만큼 당당하고 또렷하다. 60여년 전 조계사 대웅전서 법문하던 그날 또한 이와 같지 않았을까.

명성 스님은 1930년 상주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20세 남짓에 결혼해 전업주부가 되는 평범한 길을 거부한 것이다. 흔히 말하는 ‘엘리트여성’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안주하지 않았다. 6·25한국전쟁 후인 1952년 23세에 출가했다. 동진출가가 많았던 당시 불교계 풍토로서는 소위 ‘늦깎이’였다. 속가에서는 모친이 세숫물을 방안으로 가져다 줄 정도였지만 갓 출가한 스님은 공양주며 채공소임도 마다하지 않았다. 공양 준비에 설거지까지 마치면 손에 물마를 새도 없이 큰절로 달려가 경을 배웠다. 그래도 고단한줄 몰랐다.

익히 알려진 데로 부친은 관응당 지안 대종사다. 탄허, 운허 두 스님과 함께 ‘한국불교의 세 보물’로 일컬어지던 대강백이자 6년간 폐문정진한 선사셨다.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게도 일본유학을 했다. 관응 스님의 혜안은 이미 세계를 향해 열려있었다. 그런 관응 스님이 출가를 권했다. 명성 스님에게 직접 들었다.

▲부친이신 관응 스님의 권유로 출가했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려져 있다.
“권했더라도 내가 하기 싫으면 못하는 것이 출가다. 권유도 있었지만 내 생각도 있었다. 여고시절부터 불교서적을 많이 읽으면서 출가에 뜻을 두고 있었다. 이 길로 가면 오로지 수행을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속가에 머물면서 오롯이 수행하기가 힘들었다.”
▲출가 이후에는 비구 스님들에게만 경을 배웠다. 불편하지 않았나.
“삭발 본사가 해인사 국일암이다. 행자시절에는 공양주, 채공도 살면서 밥하고 설거지해 놓고 해인사 큰 절로 가서 ‘치문’을 배웠다. 비구 스님에게 배운다고 해서 불편하지는 않았다. 공부하는데 불편할 게 뭐 있겠나. 통도사 보타암에서는 묘엄 스님과 같이 통학하며 운허 스님에게 배웠다. 당시 비구니 스님 중에는 경을 가르치실 스님이 없었다. 운문사에 처음 왔을 때에도 비구 스님이 와서 학인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축발의 인연은 조금 늦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당대의 대강백 관응, 탄허, 운허 스님에게 배울 수 있었을까. 명성 스님의 출가는 비구니 교육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줄탁동시(啐啄同時)와도 같았다. 불연은 이미 숙세로부터 맺어졌던 셈이다.

관응 스님은 출가 전 낳은 딸을 비구니 대선사 본공 스님에게 보냈다. 비록 본공 스님 상좌 선행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지만 본공 스님은 손상좌를 상좌처럼 아꼈다. 유독 명성 스님의 공부를 챙겼다. 동산 스님으로부터 ‘꿈도 꾸지 않고 생각도 없을 때 내 주인공이 어느 곳에 있어서 안심입명하는고’라는 화두를 받은바 있는 명성 스님은 한 시도 그 화두를 놓치지 않았다. 손상좌의 법기(法器)를 간파했음에도 선방 정진 못지않게 공부를 당부한 것은 비구니 교육의 큰 물꼬를 틀 인재가 절실한 시절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본공 스님의 바람에 부응하듯 동학사 강원을 졸업한 명성 스님은 1958년 성능 스님으로부터 전강 받았고 비구니 강사가 되었다. 불학연구소장 수경 스님의 ‘한국비구니 강원 발달사’에 따르면 1956년 묘엄 스님(1931~2011)이 경봉 스님(1892~1982)으로부터 전강 받아 최초의 비구니 강사가 탄생한 이래 같은 해 태경 스님이 만우 스님에게, 지현 스님이 대은 스님(1899~1989)에게 전강 받고 명성 스님이 성능 스님에게서 전강 받아 1950년대 한국불교계에는 4명의 비구니 강사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오늘날 그 역사의 산 증인은 명성 스님뿐이다.

전강 후 명성 스님은 서울 청룡사에 머물며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해 학부와 석사과정을 마쳤다. 스님들에게 강의도 했다. 각지서 경전을 배우려 몰려든 스님들로 청룡사는 북적였다. 동국대서도 스님은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지도교수였던 김동화 교수는 “원시불교를 맡아 동국대서 강의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연은 이 먼 곳 청도 운문사에 있었다.

“강원은 대장간과 같은 곳
잘못한 일 있는 학인이라도
감싸고 다독거려 선도해야
근본 볼 때 나쁜 이 없어”
끝없는 용서로 수행 삼아

강사에는 ‘솔선수범’ 강조
제자에는 ‘즉사이진’ 당부

평생 많은 대중 함께하니
상좌·권속에도 친분 경계
“정 주지 않는다” 오해도

비구·비구니는 승단 두 바퀴
함께 위상 높여야 불교 발전

동국대 교수 제의를 물리치고 1970년 운문사로 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청룡사에 머물며 강의 하고 있었는데 스님들이 찾아와 운문사로 갈 것을 간곡히 권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긴 했다. 동국대에는 일반인도 많고 스님도 있었지만 운문사는 그렇지 못했다. 운문사에 와서 비구니 스님들을 교육하는 것이 훨씬 의미가 크다고 생각했다. 당시 운문사에는 묘엄 스님이 강사로 계셨는데 수행에 뜻이 있었다. 묘엄 스님이 선방으로 떠날 결심을 하자 운문사 스님들 8명이 청룡사로 나를 찾아와 사정을 말한 것이다. 처음엔 묘엄 스님께서 더 계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스님을 설득할 생각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여의치 않아 불가불 내가 맡게 됐다. 당시 운문사는 여러 가지 여건이 열악했다. 전기가 없어 램프에 불을 밝혀 책을 봐야 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학인들한테 돈을 꿔야할 정도였다. 청룡사에서 운문사로 오면서 청룡사 학인 20여명이 함께 이곳으로 내려왔다. 운문사 학인들과 합해 60여명의 학인대중을 꾸렸다. 금당에서 화엄반까지 60여명이 함께 생활했다. 지대방에 4학년이 살고 나머지는 한 방에 다 살았다. 무척 협소했다.”
▲한 번도 운문사를 떠날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나.
“운문사에서 45년을 살고 있다. 76년까지는 강사로 있었다. 운문사 강사 초기에 5개월 24일 동안 광우 스님과 동남아 유럽, 미국을 여행한 적이 있다. 여기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편지까지 써 놓고 다른 강사를 구하라고 했다. 그렇게 외국서 돌아오니 내가 왔다는 소문에 학인들이 박수를 치면서 청룡사로 올라왔다. 나를 데려가기 위해 온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도 몰랐다. 당시 광우 스님 상좌가 운문사 재무였는데 짐을 찾으러 가야 된다며 부산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짐이 배로 온 줄만 알았다. 그래서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차가 부산으로 안가고 자꾸 운문사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내가 떼를 쓰며 내려달라고 해도 내릴 수가 없었다. 납치당한 꼴이었다. 그래서 결국 다시 운문사로 오게 됐다. 그러고는 떠날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다.”

그만큼 비구니 강사 만나기가 힘든 시절이었다. 6개월 가까이 운문사서 새 스승을 기다린 이들도, 청룡사에서 이 먼 운문사까지 따라나선 이들도 오직 스승 하나 바라본 길이었다. 비구 스님들에게서 경을 배울 수밖에 없었던 명성 스님 자신이야말로 제자들의 그 마음을 가장 잘 헤아렸을 터다. 명성 스님은 운문사서 비구니 스님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사롭지 않기는 예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은 영어책 읽는 소리가 나고 어느 날은 풍금 반주에 맞춰 노래도 들렸다.

   
▲ 법석에 오른 명성 스님으 대중들 모두에게 ‘불성’이 있음을 강조했다. ‘버릴 이가 하나도 없다’는 스님의 원칙 그대로다.

▲학인들을 지도하며 외부 강사를 불러 특강도 했고 외전도 많이 가르쳤다. 당시만 해도 외전 강의가 흔치 않았을 것 같다.
“운문사강원은 외전 강의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런 것을 해야만 현대사회와 호흡할 수 있다. 동떨어지지 말고 현 시대의 사람들과 수준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풍금 치며 노래도 가르쳤다. 비구니 스님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아야 한다. 수행은 당연히 으뜸이어야 하고 지식 면에서도 뒤처지면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당시는 출가자들의 학력이 좀 낮은 경우도 있었다. 동진 출가하신 분들도 많았기 때문에 그 스님들을 위한 기본적인 교육도 필요했다. 내가 책을 사다가 가르치면 ‘왜 저렇게까지 애를 쓰는가’하는 분들도 계셨지만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학인들을 지도하며 주지 소임까지 맡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곳에서 강사와 주지를 맡아 살다가 1977년 운문사 강원 강주 겸 운문사 주지가 되었다. 강주와 주지를 겸직한 경우가 처음이었다. 후에 동학사나 봉녕사, 청암사가 우리를 모델 삼아 소임자가 학장과 주지를 겸해 살게 되었다. 그런 제도 또한 운문사가 일군 혁신인 것 같다. 그 덕에 운문사의 재정이 안정되고 승가대학도 발전할 수 있었다.”
▲많은 대중을 이끌어오면서 특히 어려웠던 일은 무엇인가.
“학인들 돌보는 것은 늘 조심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어떤 잘못을 했어도 들여다보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 사람 이야기를 듣고 다독거려서 살아야 한다. 아무리 잘못한 사람이라도 용서하는 것을 내 수행으로 삼는다. 용서하고, 또 하고, 또 하는 것이다. 내쫓아야겠다고 생각해 본적 없다. 대중공사를 해서 쫓아내야한다고 대중이 주장하더라도 내가 나서서 그 사람을 붙잡는다. 여기는 대장간과 같은 곳이다. 이 사람이 잘못됐다, 나쁘다고 해서 내보내면 그 삶은 뭐가 되겠는가. 감싸고 다독거려서 선도해야 한다.”
▲스님 눈에는 내쳐야 될 사람, 몹쓸 사람은 없는가.
“근본을 볼 때는 나쁜 사람이 하나도 없다. 어쩌다 실수를 해서 다른 사람 눈에 나쁘게 보일 뿐이다. 본바탕은 다 좋은 사람이다.”

스승은 그냥 스승이 아니다. ‘부모와 스승을 하나로 여기라’는 옛 사람의 가르침도 헛말이 아니다. 부모 눈에 버릴 자식 없듯 스승 눈에는 모두 귀한 제자다. 명성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2000여명에 육박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비구니 강사에게 경을 배우는 사미니의 모습이 익숙해지기까지 절로 된 것은 하나도 없다. ‘붉어진 대추 속 태풍 몇 개, 벼락 몇 개 들어있다’는 시처럼 오늘날 선교(禪敎)의 두 기둥이 한국불교를 굳건히 떠받치기까지는 교학에 매진한 수많은 비구니들이 있었고 그 중심엔 스승 명성 스님이 있었다.

▲이제는 비구니 강사·교수가 많다. 가르치는 이의 자세는 무엇인가.
“강사나 교수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지도자, 선생이다. ‘불치신경(佛治身經)’에 ‘욕교여(欲敎餘) 선자교(先自敎)’라 했다. 남을 가르치고 싶거든 나 자신을 먼저 가르치라는 뜻이다. 자신의 인격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런 입장에서 해야 된다. 남에게 ‘잘해라, 잘해라’ 하면서 자기가 잘못하면 안 된다. 솔선수범이 우선이다.”
▲제자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할 가르침은.
“‘즉사이진(卽事而眞)’이다. 모든 일에 입각해서 참되라. 작은 일도 있고 큰일도 있지만 모든 일에 입각해 진실 돼야 한다. 하버드대학에 가보니 ‘베리타스[라틴어로 ‘진실’을 뜻함]’라고 쓰여 있었다. ‘반야심경’에도 ‘진실불허(眞實不虛)’라 했다. 이 이상은 없다.”
▲그런데 유독 상좌들에게는 정을 주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많다.
“많은 대중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내 상좌나 손상좌, 권속이라고 해서 심부름 더 시키거나 각별히 더 챙기지 않는다. 심지어는 졸업할 때가 되어서나 내 권속이라는 것을 알기도 한다. 대중을 거느리고 살면서 내 상좌나 권속이라고 해서 챙기다 보면 친소(親疏)가 생긴다. ‘평등성중(平等性中)에는 무피차(無彼此)요 대원경상(大圓鏡上)에 절친소(絶親疎)’라 했다. 거울이 물건을 비출 때 나랑 친하다고 해서 더 예쁘게 비추고 나랑 멀다고 해서 더 밉게 비추는 법이 없다. 이처럼 친소가 끊어지게, 생긴 대로 비춰야 한다. 평등한 성품 속에 너와 내가 없고 가깝고 멀고가 끊어진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그래도 요즘에는 조금 더 챙기게 되는 것 같다. 상좌들이 다 자리를 잡고 잘 지내서 그런가.”
▲비구니 스님들의 활동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 같다. 현대 사회에서 비구니 스님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양성이 평등해야 한다. 남성이라고 우월하고 여성이라고 낮은 곳에 머무르거나 무시돼서는 안 된다. 비구와 비구니는 새의 두 날개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야 한다. 한 바퀴가 비구라면 한 바퀴는 비구니다. 요즘 들어보면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도 더 잘하고 열심히 한다는 칭찬이 많다. 대학 교수들도 성적은 비구니들이 더 우월하다고 말한다. 점수를 보면 비구니들이 잘한다. 여권도 그만큼 신장된 시대다. 하지만 잘난 채 하거나 오만해서는 안 된다. 겸손하되 여성이라고 해서 소극적이거나 뒤떨어지면 안 된다. 더 적극적인 자세로 참여해야 한다. 새의 두 날개가 똑같이 날갯짓을 하고 수레의 두 바퀴가 똑같은 크기로 굴러야 한다. 비구와 비구니의 두 날개가 다르고 두 바퀴의 크기가 달라서는 안 된다. 그래야 새가 높이 날 수 있고 수레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종단도 발전할 수 있다.”

명성 스님이 지나온 길에는 풍성한 성과들이 과실처럼 맺혀있다.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전국비구니회장, 운문사승가대학장 등 굵직한 소임도 많았다. 운문사 가람불사를 가장 큰 공적으로 꼽는 이들도 적지 않다. 1970년 강주로 운문사와 인연을 맺은 후 청도 운문사를 세계적인 비구니 교육도량으로 성장시켰다. 명성에 걸맞게 가람의 규모도 일신됐다. 오늘날 운문사는 꽃 한 송이, 돌 한 덩이까지 직접 살피며 불사를 이끈 명성 스님 노력의 결실이다.

하지만 인재불사의 무게를 도량 넓이에 비할까. 눈으로 보이지 않는 크기를 가늠한다면 이미 새로운 역사의 한 축이 되었다. 비구니 교육에 관한 인식을 바꾸어 놓은 것은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가치다. 깨달음만이 최고라 여기던 시절 명성 스님은 교학의 중요성, 그리고 비구니 교육의 가치를 강조하고 토대를 다졌다. 비구니들도 경을 펼쳐 부처님과 옛 조사들의 가르침에 다가가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선·교 겸비한 비구니 대강백이 없었다면 승단의 절반이라는 비구니의 위상은 여전히 공허할지 모른다.
명성 스님의 노력은 비구니의 위상을 눈 비비고 다시 보도록 끌어올렸다. 특히 2004년 한국에서 열린 제8차 세계여성불교대회는 비구니, 그 중에서도 전 세계 여성수행자들의 지도자로 우뚝 선 우리나라 비구니의 위상을 가늠케 했다. 2008년 UN국제여성의 날을 맞아 3월7일 태국 방콕서 여성 지위향상을 위한 협회가 수여하는 ‘탁월한 불교 여성상’을 수상한 것은 이러한 노력에 대한 작은 보답이었다.
이제 세수 아흔이 멀지 않게 보이지만 스님은 변함없이 경을 편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어 보이는 죽림헌 스님의 거처에는 펼친 경과 먹물 머금은 붓이 단정하게 놓여있다. 그것만이 오직 스님의 길이다. 그 한 길 위에서 비구니 교육의 새 시대가 열렸다.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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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에서 벗어남 없이 수십 년 한곁같은 어른

[내가 본 명성 스님]

전강제자 일진 스님 : 46년을 모시다 보니 스님이 마치 도반처럼 친숙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연인같이 가깝고 따뜻하게 보일 때도 있다. 스승은 제자에게 그런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래야 제자가 온 몸과 마음을 스승에게 의탁할 수 있다. 명성 스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분이시다. 당신 스스로의 일상은 혼자 있거나, 대중과 있거나 다를 바 없이 매사에 똑 같으시다. 그 한결 같은 모습이 제자들에게는 늘 든든한 고향이 되어준다. 상좌나 가까운 권속들에게 더 엄하고 냉정하셨는데 요즘은 조금 더 곁을 주시는 것 같아 ‘스님께서도 연세를 드셨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더 오래 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남지심 소설가 : 비구니의 위상은 명성 스님 전과 명성 스님 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비구에게만 교육을 시키고 비구니 교육은 없던 시절 비구니 교육을 개척하셨다. 무에서 유를 만든 분이다. 그만큼 ‘카리스마’도 있다.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지만 스님은 먼지 안 나는 유일한 사람이다. 매사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사심이 없고 겉과 속이 똑같은 분이다. 너무 정직해서 때로는 숨겨도 될 것을 드러내 타인에게 오해를 사는 경우도 있지만 오래 지켜보면 스님의 그 모습에 오히려 매료된다. 약간 경직돼 있고 고지식해 보이지만 그 꿋꿋함으로 인해 버리는 사람 없이 대중을 이끌어 오셨다.

이완재 영남대 명예교수 : 20여년 간 운문사에서 강의했는데 그 20여년 동안 한결같은 모습이셨다. 언제나 학인들과 같이 꼿꼿이 앉아 2시간여의 강의를 끝까지 들으셨다. 사찰에서 유교의 사서를 강의해 달라 요청할 때 의아하기도 했지만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경전 속에 유교적 요소나 용어들이 많이 들어 있어 유교에 대한 이해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하신 것이다. 남이 뭐라 하던 ‘이것이 옳다’ ‘이렇게 해야겠다’ 결심이 서면 철저하게 관철시키는 모습이 놀라울 정도다.

 [1328호 / 2016년 1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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