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
퇴근길 도시의 전철에 올라탔습니다. 쓱쓱 싹싹 민 머리에 도토리 뚜껑 같은 모자를 쓰고 칭칭 두른 목도리로 거북이 자라목을 하고 프리사이즈 걸망에 흙 묻은 털신까지, 시대를 뛰어넘은 모습으로 당당하게 장군처럼 서서 에찌있게 차려입은 그들의 시선을 한껏 받고 있는 저는 부처님의 법을 따라 출가한 이 시대의 수행자입니다. 반갑습니다. 사교반 보경입니다. 출가할 때 저는 절집의 수행체계나 교육체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인연이 있는 작은 절로 출가하여 며칠 후 선방 행자로 가게 되었을 때 저는 정말 깜짝 놀랐었습니다. 그것은 한방 가득 앉아 계시는 스님들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운문사 새벽예불 얘기를 듣고 궁금한 마음에 친구와 참배도 아니고 동참도 아닌 구경삼아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까만 새벽을 가로질러 찾아간 구경꾼 눈에 새벽예불은 별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사실 저는 규모도 작고 조용할 것 같은 다른 강원으로 가고 싶었었지만 애당초 저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고 저 또한 아직 덜된 중이니 어디서든 세월 잘 보내면 된다 생각했기에 그냥 따르기로 했습니다. 더 솔직한 마음은 그 전부터 강원이니 승가대학이니 하는 그런 말들이 저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저는 출가하면서 그저 표 나지 않는 조용한 수행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입학한 후 콩나물시루 같은 지대방에서 해방된 후부터의 저의 생활은 저의 희망사항과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펼쳐졌고 그와 함께 저의 꿈은 숨돌릴 틈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비슷한 대중들 속에서 쏟아지는 전달사항과 걱정거리, 눈만 돌리면 찾아오는 설거지와 청소, 돌아서면 찾아오는 배고픈 허기짐, 몇 가지 안 되는 빨래 널 시간조차 없이 몰려 다닌 시간 속에서 저는 저 자신의 육근(六根)을 통해 빠져나오는 삼업(三業)을 조절하지 못했습니다. 피곤하고 힘들다는 것을 방패삼아 저 자신을 다스리기 보다는 자신을 방어하고 스스로에게 방일(放逸)하며 누구나 다 불완전한 존재인데 완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부정했습니다. 그 결과 첩첩산골 구름속 운문(雲門)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저의 의식은 저도 모르는 사이 '어디 조용한 데 없나? 어디 딴 데 갈 데 없나?'를 반복하는 허망한 시간들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훗날 기억할 수 있는 귀한 회상꺼리는 되지만 절대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2년을 보낸 초심의 수행자는 지난 그 힘들고 정신없었던 시간들을 지금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급격한 변화를 앞둔 강원 속에서 어쩌면 나름 전통방식으로 수행해본 마지막 세대로서의 경험을 소중하게 맛보았고 정신 차리기 힘들었던 시간을 핑계 삼아 이제라도 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보내다 문득 제가 살고 있는 강원(講院)이라는 곳의 사전적의미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소개해 드리면 강원은 불교사찰에 설치되어 있는 경학(經學) 연구 전문교육기관이며 그 시초는 삼국시대부터 시작하지만 근대 강원의 모습은 1566년 조선시대 승과가 폐지된 후 휴정(서산대사)이후에 생겼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현재와 같이 사미과, 사집과, 사교과, 대교과의 4단계의 모습이었다고 하며 당시에는 이수와 졸업이 아주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독송(讀誦)하는 사미과는 묵언(黙言)속에서 간경(看經)하는 사교과와 대교과의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했다는 기록도 있었는데 이 점으로 우리의 수직적인 상하판관계를 서로 배려하는 관계로 돌려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백과사전의 마무리에는 ˝비구니 강원으로서 규모가 가장 큰 곳은 운문사이며 특히 운문사강원은 규율이 엄하기로 유명하며 수업내용이 훌륭하다˝라고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출가(出家)하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니라고 옛적부터 선사(禪師)는 말씀하셨습니다. 부족한 저의 얘기를 들어주신 대중스님여러분.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