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無 我_법일스님

최고관리자 | 2013.08.07 15:05 | 조회 3430



無 我

법 일 / 사교반   

어느 날 금오스님께 한 수좌가 찾아와서 여쭈었습니다.

“스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입니까?”

금오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래면목까지 거슬러 갈 것 없이, 지금 바로 이 자리의 현전일념(現前一念)부터 일러라.”

안녕하십니까? 사교반 법일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지금 저마다 자신이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가 깨달음에 이르는 자신의 도량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이곳에> 그리고 <언제 어느 곳에나> 영원히 현존하고 있는데도 왜 깨닫지 못하는 걸까요?

부처님께서는 정각(正覺)을 이루시고 나서 탄식하여 말씀하시기를

“기이하도다. 일체 중생이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건만, 단지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 증득하지 못할 뿐이로구나.” 라고 하셨습니다. <금강경>에서도 색성향미촉법에 오염되어 전도된 망상과 집착을 버려야만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누누이 거듭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무수한 세월동안 익혀온 탐내고, 분노하고, 어리석은 죄업을 소멸하고, 살아오면서 길들여진 삿된 가치관과 습관을 떨쳐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몸뚱이에 끄달리면서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진심과 분심을 일으키고 그것을 참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을 깊이 반성하지만 그것도 그저 한 순간일 뿐입니다. 어느새 또다시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반성과 알아차림 없이, 무의식적으로 그 마음이 바로 <나>라고 여기면서 그것이 흘러가는대로 닥쳐오는 경계마다 그대로 따라 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겪는 모든 괴로움의 근본원인은 허망한 자아를 실재한다고 믿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데도 무아(無我)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 몸과 마음을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독송하는 <반야심경>에서도 오온이 공함(五蘊皆空)을 그토록 반복하고 있는데도 독송은 그저 독송일 뿐입니다.

사실 불이 존재하기 때문에 타는 것이 아니라, 타는 그것을 일컬어 불이라 하며, 강이 존재하기 때문에 흐르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강물을 강이라 한다는 사실은 응당 그러한 것으로 여기지만, 자아의 경우는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느낌은 수행이 깊어지고, 깨달음이 깊어지면서 점점 사라진다고 합니다.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신을 특정한 육체를 지닌 독립된 개체라는 생각을 버리는 순간 깨달음은 드러난다.

구속은 육체와 <나>를 동일시하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생겨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는 그릇된 생각과 외적인 대상을 실재로 착각하는

무지만 버리면 된다. 모든 고통은 <나>와 육체를 혼동하기 때문에 생긴다.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 장면들이 스크린을 해치지 못하듯이, 스크린은 물에 젖거나 불에 타지 않고 거기에 그대로 있다. 어떠한 장면도 스크린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육체나 이 세상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스크린 위를 지나가는 일시적인 영상일 뿐이다. 현상계란 자신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세계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대 스스로 체험할 수 있을 때까지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올바로 살아가고자 원(願)을 세우고, 이를 성취하고자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소멸하며, 법에 대한 믿음과 정진력을 키우는 것이 수행입니다. 똑같은 하루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일상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수행입니다. 진정한 수행자라면 수도(修道)를 단지 생활의 한 부분으로 해서는 안되며 수행이 생활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평소의 생활 하나하나가 모두 수행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루의 일상중 얼마나 수행으로 챙기며 살고 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수행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다음은 <대반 열반경>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자주 모여 경전을 강의 독송하고

서로 화합하여 교법과 계율을 배워 지니고 연마하며

의식주 생활을 검소하게 하라.

세존의 가르침대로 서로 아끼고

세존의 뜻에 따라 후학을 가르치며

언제나 여래의 참뜻을 사유/음미하면

여래의 법은 영원히 쇠퇴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렇게 강원에 모여 경전을 배우고 익히며 함께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주신 어른 스님들, 선배스님들, 그리고 대중스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사대(四大)가 화합한 것을 몸이라 부르거니와, 사대가 주인이 없기에 내 이 몸도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과연 무엇이 있어 지금 이 자리에서 뚜렷이 밝고 지극히 신령하게(昭昭靈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걸까요?

다른데 정신을 팔지 말고, 바로 지금 이 자리를 잘 살펴야 합니다. 목전(目前)을 잘 살펴야 합니다.

대중스님 여러분,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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