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은 변하게 하는 것, 행복은 덤
사미니과 혜도
운문사에서 수행 정진하고 계신 대중 스님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수행은 변하게 하는 것, 행복을 느끼는 것은 덤입니다."이라는 주제로 차례법문을 하게 된 치문반 혜도입니다.
"대중 스님들, 지금 이 순간, 이곳에 계십니까?"
여러분께서도 지금 이곳에 있으시기까지 의미 있는 순간들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제게 의미 있는 몇 장면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마음은 자유라 원하지 않는 분들은 당신의 순간에 계실 듯합니다.
대중 스님들, 부처님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 언제이십니까?
제가 기억하는 첫 순간은 어렸을 때 어머니 무릎을 베개 삼아 듣던 동화책에서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신 분이라는 어머니 말씀이 어린 마음에도 이상하게 느껴진 모습과 내용 때문에 기억납니다. 그즈음 듣고 보는 이야기책에서는 주로 궁전이나 대궐로 가서 사는 게 행복한 결말인데 왕좌를 버리고 궁을 나왔고, 주인공이 착하다거나 나쁘다거나 하지 않았고, 옷도 화려하지 않았고 몸에 지닌 것이 별로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미소의 부처님 모습, 그분의 둘레를 둘러앉아 무엇인지 진지하게 듣고 있는 스님들의 뒷모습, 호랑이 사자 코끼리 토끼 새 등 다양한 동물들이 그 뒤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언젠가 저도 가서 듣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순간은 20대에 점안식에서 지금의 은사 스님을 만났던 때입니다. 당시 운문사 졸업 후에 동국대를 다니시던 스님과 지금까지 이어져 은사스님으로 모시게 되었으니, 인연의 힘에 그저 감사합니다.
대중 스님들, 한 번쯤은 적어 보셨을 여러분의 소망 목록에는 무엇이 있으십니까?
영화 제목으로 유명한 버켓리스트라는 단어가 더 친근감 있으시겠지요. 했던 일 하는 일에 만족하는 마음보다, 하지 않은 일들 때문에 후회하지 않겠노라고 소망 목록을 적어 보신 일이 있으실 것입니다. 아마도 일부 대중 스님들께서도 해 보셨을 일들입니다. 바리스타 수업 받으며 우유로 커피에 하트 한 번 그려보겠다고 주변 지인들 커피 꽤나 마시게 해서 탈나게도 하고, 재봉틀을 배워 이것저것 만드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친구에게 어설픈 옷 만들어 입혀주고 서로 머쓱해하고, 맛집 순방하고, 좋다는 곳으로 여행가기…….
많이 지우고 나도, 하고 싶은 것을 그렇게 했는데도 무엇인가 계속 부족했습니다. 더는 소소한 일들만 지우며 지체할 수는 없다며 도시를 떠나 바닷가에 살며 꼭 해 보고 싶었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개인 도서관을 지인과 운영했습니다. 서툴지만 목소리를 바꾸어 읽어 주었는데도 기대기도 하고 눕기도 하며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책을 가까이하고 서로 소통하며 아이들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보며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즈음 제가 하던 일에 대해 깊은 회의가 드는 일이 있었고, 번뇌가 가득했던 겨울 꽁꽁 언 몸으로 무리하게 책을 들다 허리를 다쳤습니다. 마음의 번뇌가 몸을 쳤습니다. 돌아눕는 것이 안 돼서 혼자 화장실 가기도 어려웠고, 평생 처음으로 몇 달을 거의 누워서 지냈습니다. 그 몇 달 동안 위안이 된 것은 누워서 본 불교방송의 새벽 예불과 겨울 산이었습니다. 산색과 하늘빛, 설경, 바람이 지나는 자리의 구름은 제 마음같이 단 한 순간도 같은 모습이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었을 때 지금의 은사스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스님, 안녕하셨습니까? 접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잘 지내고 있지요. 보살님도 행복하시지요?" "예, 행복하죠. 이런 이유로 행복하고 저런 이유로 행복하지요."
잠자코 저의 일상과 하고 있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을 들으시던 은사스님께선
"보살님, 마을에서 하고 싶은 일, 할 만큼 많이 해 보았잖아요? 행복했었지요.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던 그 많은 일들을 하고 났는데도 무엇인가 부족하지요. 조건 지어진 행복은 그 조건들이 변할 때 고통의 느낌으로 변하는 것이기에 苦(고)예요. 완전한 행복은 조건이 필요 없지요. 보살님, 이제는 출가해서 수행자의 길을 가면서 부처님처럼 진정한 행복을 알기 바랍니다."
긴 소망목록을 보니 결국 조건 지어진 행복들의 나열이었습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이제 그만 타겠다는 것을 모르는 불처럼, 바다처럼, 재산은 이만하면 됐다는 것이 없는 탐욕 많은 자처럼 살던 삶이었습니다. 지족함을 모르는 제 삶이 부끄러웠고 슬펐습니다.
탐욕에서 위험을 보고 수행자로 사는 삶, 당장 해야만 하는 일을 정했습니다. 여러 순간의 한 점 한 점들이 연결되어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아이고 혜도스님, 길기도 길고 정말 어렵다"는 표정들이십니다.
그렇게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며 힘이 들고 불편할 때, 몸이 아플 때
“수행의 길을 꼭 이곳에서 이 방법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혜도는 삐뚤어질테다 데이입니다.”하며 투정을 하고, 나약한 생각을 하며 업을 짓습니다. 선업만 지어도 부족한 데 말입니다. 저의 투덜거림이 나오기 바쁘게 도반스님들은
“지금 이 길처럼 이곳처럼 좋은 곳은 없어요, 치문만 지나면, 같이 포행 갈까요, 커피 줄까요, 릴렉스 등등”
“도움을 주기 위해 일곱 걸음을 같이 걸은 사람은 친구요, 열두 걸음을 함께 걸은 사람은 진실한 동지이며, 보름이나 한 달을 함께 있으면서 성실하면 친족이고, 그 보다 더 많은 세월을 보냈으면 자기 자신과 같다.” 고 하신 부처님 말씀을 생각합니다. 한 달 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낸 도반 스님들이 저의 불선심을 선심으로 바꾸어 줍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도 힘들 때 수행자의 길을 제대로 배우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 때 읽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오직 부처님만이 지니신 십팔불공법( 十八不共法) 중 ‘하나의 커다란 슬픔(大悲)’부분입니다. 『
『지자는 일체 중생이 생사의 고해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사도에서 헤매지만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음을 보고 슬픔을 일으킨다. 오욕의 갈구함이 마치 목마른 자가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음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내가 없는 데서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일으킨다. 늙음과 병과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오히려 그 업을 짓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무명의 어둠 속에 있으면서 지혜의 등불을 밝힐 줄 모르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일으킨다.』 [대방등대집경]
또 한 가지는 제가 행자 때부터 쓴 일기에 은사스님께서 여러 말씀을 자필로 써 주신 수행일기입니다.
이 글들을 읽고 나면 빠하라다경의 말씀처럼 승가에서의 삶은 저를, 바다가 점점 깊어지듯이 천천히 깊어지게 하고 있음을 믿게 됩니다. 잘못된 것에 대한 집착을 바꾸고,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선하고 바르고 참되고 밝은 것으로 바꾸어 가겠다고 다시 다짐합니다. 떨어져나가는 에고에 아픈 몸과 마음은 다시 살게 하려는 몸살이라고 받아들이고, 참회하고, 지금 누리는 많은 것들에 감사하며, 매순간 다시 시작합니다.
지나고 보면 이 법문이 얼마나 철없는 말이겠습니까. 또 업을 짓고 있음이 두렵기도 합니다.
강원에서는 선심을 유지하고, 하심하며 조화롭게 살아가겠습니다. 마음의 번뇌가 몸을 쳤을 때 극복하지 못하고 멈췄던 책 읽어주는 일, 이제는 부처님 말씀과 함께 더 많이 전하며, 개인적으로는 수행 정진하는 스님으로 살고자 발원합니다.
단지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시작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하나의 커다란 슬픔"을 그만하는 사람으로 변해 가고자 합니다.
행복을 느끼는 것은 덤일 뿐입니다.
대중스님들께서 열반을 성취할 수 있기를 마음 속 깊이 기원하며,
오늘 차례법문 한 이 모든 공덕을 어른 스님들, 대중스님들,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게 해주시는 고마운 인연들, 이 세상 모든 존재들에게 공평히 회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