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보살의 명호
사집반 준호
안녕하십니까? 만물이 새봄의 파릇함을 위해 한껏 떨구고 비워낸 이 겨울에 차례법문을 하게 된 사집반 준호입니다. 저는 ‘불보살의 명호’를 주제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청량하고 고요한 기운이 감도는 이른 새벽,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깊은 산 중에 당당한 기세로 기지개를 편 운문사 법당에서는 낭랑한 염불소리가 힘차게 새벽을 엽니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날마다 부르는 불명호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혹시 이렇게 많은 부처님의 명호에 대해 궁금해하신 적은 없으셨습니까?
대승불교권에 속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절을 가든지 여러 불보살님을 함께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수학하고 있는 이곳 운문사만 해도 법당이 여덟 곳이고 각각의 전각에서 적게는 한 분, 많게는 500여 분의 깨달음을 이루신 성인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제화가라보살 등 여러 불보살님들을 뵙게 되는데 비단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삼천불명호경』이나『만불명호경』에는 부처님이 삼천 분, 만 분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불보살님들 속에서 때로 우리는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기도를 할 때 과연 어느 분의 명호를 불러야 하나’ 망설이기도 했을 겁니다. 제가 사리암 소임을 살면서 만나본 재가불자 중에는 다음과 같은 고민을 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집에서 관세음보살 기도를 하고 있는데 여기 사리암 나반도량에서는 나반기도만 해야지 관음기도를 하면 안 되겠죠?”
초기불교에서의 부처님(佛)은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석가모니 부처님만을 가리켰습니다. 그렇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사상이 등장하게 되었고 타방불(他方佛)신앙이 생겨 서방(西方)에는 아미타불, 동방(東方)에는 아촉불 같은 여러 불보살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삼신불(三身佛)사상의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은 다름 아니라, 바로 한 분의 부처님을 삼신으로 나누어 표현한 것으로, 법신불(法身佛)이란 법계에 항상 가득한 생명의 광명과 깨달음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보신불(報身佛)이란 부처님의 자비, 지혜, 행복과 같은 무한한 공덕을 뜻하고, 이러한 법신과 보신을 바탕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나투신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현상계를 모두 화신불(化身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이 너무도 많은 까닭에 하나의 이름으로 해서는 전부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자비로운 측면을 관음보살이라 하는 것이요, 지혜로운 측면을 문수보살이라 하는 것이며, 병든 이를 애민히 여겨 구제하는 측면을 일러 약사여래라 하는 것이지 관음보살, 문수보살, 약사여래가 따로 있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저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 은사스님께서 보실 때는 어리버리한 상좌 준호요, 강사스님들께는 객스님 준호이며, 상하반 스님들에게는 사집반의 준호 스님인 것처럼, 다만 여러 관계들 가운데 역할이나 입장에 따라 달리 불릴 뿐 이 세 명이 따로이 있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한 분의 부처님을 두고서 무량한 공덕의 모습에 따라 아미타불로도 불렀다가 약사여래불로도 부르고 제화가라 보살 등 여러 가지 많은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삼천불, 만불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 비추어 보면 모두 하나의 부처라는 것을 우리는 바르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염하더라도 나반존자와 둘이 아니고 다만 그 모두가 부처님의 원만한 성품을 가리키고 있음을 바르게 볼 수 있다면 어떤 명호를 외든 거기에 걸리거나 어떤 분별상을 내어서 혼란을 겪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매일 새벽이면 어김없이 하게 되는 108참회...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첫 발심했을 때의 간절함은 온데간데 없지는 않으십니까? 부처님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을 하나하나 말해주고 있는 불명호를 염할 때, 다만 일심으로 실상 그 자리, 원융하여 둘이 아닌 부처의 성품자리를 관하며 간절히 재발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