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자비로운 사기꾼_여친스님

가람지기 | 2010.12.29 18:46 | 조회 3983



자비로운 사기꾼



사랑의 속박이 꿈이라면 출세의 해탈도 꿈입니다.
웃음과 눈물이 꿈이라면 무심의 광명도 꿈입니다.
일체만법이 꿈이라면 사랑의 꿈에서 불멸을 얻겠습니다.

- 만해한용운『꿈이라면』-


대중스님 안녕하십니까? 화엄반 여친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닐 때 대중스님들께서는 어디에 마음을 두시겠습니까? 생각이라는 것은 항상 모순을 낳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 너머의 것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별이 반짝일 수 있는 건 어둠이 함께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광명이란것도 부처님이라는 것도 대서원이라는 것도 모두 무명과 중생이 함께이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수행이라는 이름아래 또 다른 덫에 걸려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부터 바람이 없는 바다 위에 배를 하나 띄워보겠습니다.

옛날, 너무나 서로 사랑하는 아버지와 딸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아이가 아버지 목에 목마를 타고 해안가를 걷고 있을 때 아버지가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햇빛이 바닷물에 닿으면?" 7살난 꼬마 아인 활짝 미소 띈 얼굴로 손가락을 하늘을 가리키며 "은· 하· 수" 라고 대답했습니다.

은하수는 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중스님들께서는 바닷물 속에서도 별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문을 여셨습니까?

그런데, 이 生에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아이는 그 해가 가기 전 죽음을 맞이하였고,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우리들의 개념으론 삶에서 고통으로 받아들여지는 한 부분이지만, 별이 된 아이는 너무나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어떤 무엇인가로 존재할 때보다 별(순수-불성)이 된 지금은 자신이 진심으로 보고 싶을 때 사랑하는 아버지를 언제나 내려다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고 싶을 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 무엇인가 하고 싶을 때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고 해나갈 수 있는 것!

그것이 욕심이 아니라 흐름에 내맡겨진 파도라면 지금 이 순간 바람이 없는 물결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외부의 많은 것들을 통해 마음에 기억하고 반응합니다. 그러다 보니 실질적으로 제대로 들어앉아 있는 것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원력, 보살, 성불, 업장 수행하면서 만나는 흔하디 흔한 이런 개념들을 비롯해 이렇게 해야한다. 저렇게 하면 안된다 라는 일상생활 매순간 부딪히는 것들이 단지 외부의 갖가지 개념을 통해 기억되어져 있을 뿐, 진실로 자신의 내면을 통해 알아진 것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렇게 기억 되어져 있는 것들이 스스로 그것에 대해 '알고있다'라고 잘못 인식되어 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만나는 우리들의 의식은 아주 큰 빙산의 一角에 불과합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과는 달리 잠재의식 속에 나도 모르게 들어 앉아있는 下의식 속의 下의식들은 너무나도 신비롭고 충격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있는 그대로 이지만, 수많은 生동안 갖가지로 뿌려 놓은 因에 의해서 일으키는 그 생각들을 실상 의식 밖으로 꺼내 놓고 보면 내가 알고 있던, 내가 '나'라고 규정해왔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단지 여러가지 모양으로 느껴지는 것 일 뿐 입니다.

바닷속에 잠긴 그 무의식은 수면의 물결을 통하지 않고서는 인식 되어질 수 없습니다. 번뇌가 마구니가 아니라 곧 보리인 이유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열심히 수행하고 열심히 무언가를 지어가지만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그 인위적인 습관들 때문에 자신 내면의 저절로 흘러가는 흐름들을 알아차릴 동기가 인연되어지지 않습니다. 화두를 들겠다는 생각, 이 생에 성불하겠다는 서원, 업장을 녹여야만된다는 마음 그것 또한 잘 관찰해보면 화두와 서원, 업이라는 내안의 관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의 분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의 극단을 버리고 또 다른 극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냥 내맡겨두면 무한히 잠재되어 있는 환상들을 더 이상 덧칠 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근본없이 잘못 입력되어져 있는 환상들을 볼 수 있어야 無常의 바른 이치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맡긴다는 것은 "저절로 행해지는 속에서의 바른 자각" 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우리가 조작하는 '업'이라는 굴레, 이것과 저것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난 자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저절로 흘러가는 흐름은 바닷가에 반짝이는 은하수를 바라만 보아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그 별들을 헤아려서 알아지는 것 또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비심'이라는 말로조차 표현할 수 없는 저절로 그러한 그것을 「선가귀감」의 첫 구절에 "佛祖出世하시니 無風起浪이니라." 라는 말에서 이해를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서 佛祖出世가 무엇인지? 왜 바람이 없는 물결이 가능할 수 밖에 없는지? 왜 자비로운 사기꾼인지? 직접 자신의 내면을 통해 느낄 수 있으려면, 열린 마음만이 어떤것으로도 건널 수 없는 모든 벽을 허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물결은 분명 저절로 일어나지만 그 자비에 속아서도, 그 별은 분명 저절로 존재하지만 그 존재에 속아서도 안되겠습니다.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한 꼬마아인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었습니다.

대중스님 여러분. 서툴더라도, 지금 당장 완벽하지 않더라도, 아주 아주 잠깐이 될지라도, 자신의 흐름을 믿고, 느끼기엔 그 무언가가 필요한게 아닌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 바람이 없는 그 자비의 물결을 느끼실 수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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