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의 삶에 대하여 안녕하십니까?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매화의 향기가 그윽하듯 수행의 향기를 뿜어보고자 저의 출가 동기는 단순한 것 같습니다. 어느 따뜻한 봄날 죽음을 눈앞에 둔 제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숨이 꼴딱꼴딱 하고 있는 사이에도 생각은 수도 없이 교차하겠지요.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마음일까? 아마도 지난날들을 돌아보지 않을까 싶습니다. 살면서 가장 해보고 싶었던 일에 대한 미련, 혹 한이 맺혀서 그 한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제 자신이 너무 가엾다는 생각과 그렇게 죽기는 싫다는 맘이 들면서 홀연히 출가의 길로 들어서게 됐습니다.
저희 은사스님께서 강원 어디갈래? 물으시기에 강원 갈 생각도 안하고 있는데 운문사는 못 올 것 같아 다른 강원 이름을 댔습니다. 그때부터 은사스님께서는 전투태세로 바뀌셨습니다. 제가 몰랐던 거지요. 위에 형님의 20일 단식에도 끄떡 없으셨던 분인걸 말입니다. 걸망을 챙기고 차 앞자리에 앉으라고 하셔서 아무 생각 없이 오는데 스님께서 저보다 더 비장한 표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무구야, 좋은 연장이 되어서 돌아 오거라.” 저는 그만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고 그 말씀이 동아줄이 돼서 저를 묶고 묶고 또 묶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치문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던 힘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내가 연장이면 운문사는 용광로인가? 그러면서 발을 내딛었는데 역시 운문사는 곳곳이 용광로 아닌 곳이 없었습니다. 무쇠와도 같은 제가 아주 바늘 끝 만하게 불에 닿기 시작하는 걸 느꼈습니다. ‘나’ 라고 하는 것을 보기시작하면서 항상 내 마음의 허물만을 보고, 남들의 시시비비를 보지 않기를 바라며 분별심을 여의고자 애쓸 줄을 알게 되었고 신, 구, 의 삼업을 단속하여 숙세의 업의 습기까지 다 녹여 일념, 무상, 무념으로 가고자 자신을 살피고 애쓸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설우스님의 강의를 통해 마치 물방울이 물 위에 떨어지면서 반짝하고 무늬를 만들 듯 그렇듯 첫 맛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환희로웠습니다. 금방 공부가 될 것도 같았는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늘 여여한 것이 아니라 가다가다 한번씩, 어쩌다 일 년에 한번 씩 정말로 뱁새가 총총총 열 발자국 걸어 먹이 한번 쪼아 먹듯 하니 또한 조바심이 나서 없는 머리를 쥐어 뜯어보기도 했습니다.
불법을 만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점은 진실 된 앎으로 인해서 즉각적인 성장과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라는 그릇된 견해, 남을 배려하고 미워하지 않게 되는 마음, 주기 어려운 것을 주고 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해나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괴로울 때 서로를 버리지 아니하고 비천함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이러한 선의적인 행위는 불법의 힘이 아니고서는 얻기 어렵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은사스님께서 “중은 자기 팔자를 능가할 수 있는 공덕을 쌓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여년 전 어느 큰스님의 법문 중에서 잊을 수 없는 법문이 있어 소개할까 합니다.
첫째, 밥을 적게 먹어라. 둘째, 일의(一衣) 일발(一鉢)로 살아라. 셋째, 안으로는 내심을 기르고 밖으로는 남을 도우며 살아라. 넷째, 평생 공부하다 죽어라. 이 짧은 몇 마디에 수행자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음을 절감합니다. 이와 같이 살고자, 부디 저의 뜻이 굳건해져서 불퇴전하기를 부처님께 엎드려 발원하고 또 발원해 봅니다. 이곳은 저에게 더 없이 훌륭한 수행장이 아닐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감사하며 어느 책에서의 선시 한 구절이 마음에 들어 들려드리면서 오늘 법문을 마칠까 합니다. 비는 나무꾼을 재촉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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