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죽음이후 환생세계(여허스님)

운문사 | 2006.04.10 12:29 | 조회 3604

익어가는 생명과 떨어지는 낙엽으로 물드는 황금빛 가을을 지나서 휴식과 적막을 상징하는 하얀빛 겨울의 문턱에 이르렀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티벳사자의 서에 의거한 죽음과 바르도란 주제로 차례법문을 하게 된 사교반 여허입니다.

계절과 우리의 삶을 배대한다면 일반적으로 겨울은 죽음을 상징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직은 청춘인 우리에게 죽음은 먼미래의 일인 것 같지만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에 현재 이찰나를 지난 모든 순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종종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바르도를 소개하기에 앞서 예전에 겪었던 일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절에 출가하고 강원을 오기전에 일이었습니다. 어느날 40대 후반의 한 보살님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의 49재를 지내러 왔습니다. 나이 드신분이 사고로 가셨다는게 안된 마음이 들어서 남달리 안타까웠습니다. 막재가 끝나고 두달쯤이 지난뒤에 또 절에 오셨는데 보살님의 표정은 무척 어두웠습니다. 이유인즉 아직젊은 남동생이 며칠전에 또 교통사고로 가셨다는 겁니다. 어머니와 남동생을 차례로 잃은 보살님의 황당해함을 위로삼아 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보살님께 무상계를 드리며 날마다 정성껏 읽고 기도하라며 당부하며 보냈습니다.

또 한두달쯤이 지났을까요? 처사님 한분이 아들 둘을 데리고 사무실에 오셨는데 49재 지냈던 그 보살님의 남편과 아이들이었습니다. 참으로 황당하게도 이번에는 그 보살님이 아무이유도 없이 베란다에 목을 매고 자살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 49재를 지냈습니다.망상이 커서 그랬는지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랬는지 49재 지내는 도중에 꿈을 꾸었습니다. 절마당에서 누군가 막 소란을 피우길래 나가 보았더니 그 보살님이었습니다. 아는체를 하려고 다가서다가 순간 이 보살님 죽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 보살님은 자기가 죽은줄 모르고 있구나 싶어서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보살님, 보살님은 며칠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여기 이렇게 계시면 안되고 빨리 좋은대로 가셔야 돼요." 했더니 촐랑대는 목소리로 “내가 죽었다구요 그럼 어디로 갈까요? 또 죽을까요?” 하면서 마당에 빨래줄을 잡더니 자기목을 막 조르는 것이었습니다. 꿈속이었지만 이래도 더 이상 죽지는 않는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말리다가 꿈을 깼습니다.

꿈을 깨서 한동안 멍하게 생각하기를 진짜 어디로 가야하나? 영가가 가는 길은 어디일까? 하는 죽음에 대해 휘말려 오는 의문과 영가에 대한 궁금증이 마구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이리저리 고민아닌 고민을 하다가 예전에 별생각 없이 읽었던 티벳 사자의 서가 생각나서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먼저 이 책의 원 제목은 (바르도 퇴돌)이라 하는데 바르도란 일반적으로 죽음과 환생사이의 기간과 과정을 말합니다. 쉽게 얘기한다면 중음계라 할수 있습니다. 퇴돌이란 듣고 이해함으로써 중음계에 대한 이해가 깊고 명확해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절대 자유의 경지인 해탈에 이르게 하는 가리침이란 뜻입니다. 티벳의 위대한 스승으로 불리는 파드마삼바밥가 9c쯤에 지었는데 그때는 아직 세상에 나올때가 아니라고 여겨서 후세대를 위해 그 책을 감추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4c에 다시 발견되었고 이후 여러 사람들에 의해 세계 각국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바르도에는 많은 깊고 포괄적인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죽음의 바르도만 이야기 할까 합니다. 바르도의 세계 즉 중음의 세계는 현실보다 더 섬세하고 유동적이며 고속의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생각이 즉시에 전달되며 기억력은 생전의 9배나 되며 나타나는 모든 소리와 형상들은 현생에 우리가 살아온 업에 따른 환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외적인 숨이 멎은 후에도 내적인 기는 한동안 남아 있다고 합니다. 온 몸에 퍼져있던 기가 정수리에서 심장을 지나 생식기까지 이어진 중앙 통로로 모이게 되는데 여기에 머무는 기간은 생전의 수행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은 4일반 정도라고 합니다. 생전에 나쁜 업을 많이 지은 사람이나 수행이 부족해서 에너지 통로가 막혀있는 사람에게는 이 기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서 체험하게 되는 투명한 빛의 출현을 인식할 수가 없고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게 됩니다. 이 투명한 빛은 육체와 의식이 사라진 우리 본연의 모습인데 우리의 기운은 이 빛과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 결합체가 곧 진리의 몸인 법신이되며 이 법신은 태어난 것도 아니며 노력으로 만들어 지는 것도 아니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각성의 상태로 존재하게 됩니다. 이 투명한 빛과 나의 이 에너지가 지금 하나라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서 그 자리에서 절대 자유의 경계 즉 해탈에 이르게 됩니다.

죽음의 길을 가는 사람이 첫 번째 나타나는 이 투명한 빛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의심해서 외면했다면 두 번째의 투명한 빛과 만나게 됩니다. 에너지가 중앙통로에 모여 있던 육체의 여러 구멍을 통해 빠져 나가게 되는데 이때 두 번째 투명한 빛이 나타나게 됩니다. 죽은 사람은 이 의식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지만 자기가 지금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알지 못하는 혼란 때문에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합니다. 앞에서 예를 들었던 꿈속에서 제가 보았던 그 보살님이 처한 상황쯤이 되겠지요. 여기서는 여러 가지 빛과 소리의 환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때에는 두려움과 허탈감에 빠지게 되며 강한 빛과 소리의 충격을 피하기 위해서 환영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이때에 어떠한 환영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무의식과 과거 경험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의 투명한 빛도 인식하지 못했다면 쳐다볼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게 밝은 푸른빛이 다가옵니다. 대부분 너무 두려워서 오히려 함께 나타나는 어두운 흰빛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싶어 합니다. 이 밝은 빛에 대한 공포는 살았을때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나타납니다.

만약 이푸른빛을 똑바로 바라보고 받아들일수 있다면 투명한 빛속으로 녹아들어가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되지만 인식하지 못한다면 다음과 같은 빛들이 다시 차례차례로 나타나게 됩니다. 원초의 지혜를 지녔던 때의 모습인 눈 부신 흰빛과 관용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과거로부터 투영된 눈부신 노란빛, 자비의 마음으로부터 투영된 눈부신 푸른빛, 일에 대해 의욕적 이었을 때의 강렬하고 눈부신 초록빛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때에 놓치지 않고 눈부신 빛들을 인식하여 빛과 합일 할수 있다면 그순간에 절대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긴 세월 익혀온 탐진치의 습관이 짙거나 혹은 명상세계와의 인연이 없었다면 앞에 나타난 빛들을 결코 인식할수 없습니다.

이 사자의 서는 영가를 죽음의 세계에서 해탈 또는 환생으로 이끌어주는 긴 가르침으로 엮어진 안내서라 할 수 있습니다. 생전에 수행력이 뛰어나거나 이 사자의 서의 내용을 알고 있는사람은 눈부신 밝은 빛을 인식할 수 있지만 생전에 알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그 죽은 사람을 위해서 이 긴 가르침을 49일 동안 하나하나 읽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 불교 식으로 말하자면 천도제나 49제 쯤으로 여겨집니다. 우리의 관음 시식이나 무상게와 같은 형식적인 의미에서는 비슷하지만 죽음의 세계를 실체적으로 표현하면서 천도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보살님 영가처럼 죽음의 길을 모르고 당황해하는 영가에게는 마치 어두운 길에 횟불을 비추어 주는 의미가 될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죽음을 소홀히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지금 죽음이 오면 어떻게 하겠나고 물어 보았더니, “인연 따라 업따라 가는 거지요 뭐“ 하면서 가볍게 이야기 하고 맙니다. 달라이라마 께서는 죽음은 삶의 일상적인 전개 과정이며 죽음이 찾아오기전에 미리 준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현명한 처사라고 말합니다. 그 까닭은 죽는 순간 우리가 지녔던 마음의 상태가 해탈과 또다른 환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대중스님 지금은 김장을 막 끝낸 겨울의 문턱입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더 세차게 오기 전에 우리의 수행을 바르도에 입각해서 한번쯤 점검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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