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산중 수도생활(묘준스님)

운문사 | 2006.04.10 11:07 | 조회 3143

안녕하십니까. 치문반 묘준입니다.

제게 있어서 치문이란 익숙하지 않은 한자와 싸우기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여법한 운문사 대중이 되기 위한 치문반 생활 자체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깊어가는 이 밤에 대중스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제가 치문안에서 배운 글 가운데 치문반 생활과 가장 면밀하게 닿았던 「무주 좌계산 랑선사 소 영가대사 산거서」와 이에 대한 영가스님의 답서입니다.


무주 좌계산 현랑선사와 영가선사는 도의를 함께 나눈 도반이셨습니다. 영가선사께서 고향인 절강성 온주부 영가현의 용흥사에 계실 때 현랑선사는 무주 좌계산 깊은 산 속에서 수행하셨습니다. 심산유곡에서 보는 밝은 달과 바람이 쓸어내리는 흰 눈은 수도승의 마음을 무애자재하게 해 주었습니다. 세상의 영화를 다툼과 사람들 속에서 나다 너다를 가리는 시비분별없이 적막한 산 속을 도량으로 삼고 길게 우는 원숭이 소리를 귀 벗 삼아 지내는 무주 좌계산에서의 생활은 현랑선사께 마음과 그 뜻을 더욱 태연히 수행정진에 두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적적한 수행환경을 가까운 도반이신 영가선사에게도 권하고 싶었던 현랑선사는 “이 좌계산에 한 번 방문해 주십시오”라는 내용의 간단한 편지를 영가선사께 보냈습니다.


“우리가 헤어진 이래로 몇 년이 흘렀습니다.” 은근한 어투로 시작하는 영가선사의 답서는 현랑선사의 짧은 초대편지와 달리 그 10배가 넘는 분량입니다. 내용 또한 도를 알고서 산에 거하면 산의 아름다움이 내 눈을 빼앗아가지 않지만, 도를 잊고서 산에 거하면 산 속에서 살아도 마을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만큼 역시 시끄럽다는 것입니다. 나를 이루는 즉 5음五陰, 즉 5온五蘊이 무아인데 그 누가 인간세속에 사는 것이며, 그 5온과 6입(6처)이 공한데 어찌 인간 세속에서의 삶과 산 속에서의 삶이 다르겠냐는 영가스님의 답서를 배울 때 다시 한 번 치문반으로서, 또한 미리 깎은 스님으로서 제 자신을 뒤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운문사에 처음 방부를 들인 그 날 이후로 초분단위로 쪼개어 생활해야 하는 강원생활은 조금 더 조용히 조금 더 고요하게 제 자신의 마음을 챙기고 지키는 것을 힘들게 했습니다. 또 반 스님과 대중스님들 속에서 얽히고 설키는 24시간 강원생활은 제 눈과 귀를 그저 다른 이의 언행에만 꽂히게 했습니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하루하루는 어느덧 봄 여름 가을철을 지나 겨울철에 이르렀고, 처음 만나는 인연이라 그저 서먹하던 치문반 도반스님들과도 이제는 친소의 구분까지 생겼습니다.


봄 꽃 구경철이나 여름휴가, 가을 단풍놀이 때 외에는 이 곳 운문사는 많은 불자들과 관광객이 방문합니다. 스쳐 지나가며 학인스님들을 보는 운문사 방문객들은 스님들의 겉모습과 청도 첩첩산중이라는 환경만을 놓고서 운문사의 생활을, 소위 ‘산 속’ 스님들의 생활을 그저 한가로움과 고요함으로 일관하여 바라보며 부러워하시곤 합니다.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돈 벌려고 남의 비위 맞춰가며 일하는 것도 아니고, 세상 움직이는 속도에 쫒아가고자 누구와 경쟁하며 머리 쓰고 사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수려한 자연환경 안에서 고래등같은 커다란 기와집에서, 승가의 안온한 테두리 속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은 행복하겠다고 하시지요.


그렇지만 출가 수행자가 되어서도, 또 운문사 치문반이 되어서도 제 마음 속에서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세밀히 일어나는 망상분별과 대중 속에서 맺어야 하는 갖가지 반연들, 그리고 새벽부터 잠자리까지 쪼개고 나누어도 모자라는 강원의 시계는 강원 밖에서, 절집 밖에서 그 분들이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보던 그런 생활만은 아니었습니다. 순간순간 자꾸 놓치는 제 마음과, 순간순간 부처님을 닮아가기 보다는 중생의 그림자만 키우고 있는 제 자신을 대하는 것이 점점 힘에 겨워지던 무렵, 어느 날 제가 배운 글, 바로 치문 속에서 만난 현랑선사의 산중 수행생활 초대장에 대한 영가선사의 답서였습니다. 이 글이야말로 오롯이 치문반 묘준 아니 사미니 묘준스님으로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 진정한 저의 『치문緇門』, 말 그대로 스님이 되게끔 한 문이었습니다.

만물이 분분하지만 그 성품은 하나이며

영묘한 근원이 적적한데 비추지 않아도 앎이니

실상은 천진이요 영묘한 지혜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미혹하여 그것을 잃었다 말하고

사람들이 깨달으니 그것을 얻었다 말하나니

얻고 잃음이 사람에게 있을지언정

어찌 환경의 시끄럽고 조용함에 관련하겠는가.


늘 정진 여일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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