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게놈 project와 21세기 불교(선우스님)

운문사 | 2005.12.26 11:11 | 조회 3191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내 말을 그냥 받아들이고 法을 믿어선 안된다.

너희는 내 말을 이치적으로 사유하고 검증한 후

옳다고 생각할 때 너희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부처님도 맹목적 신앙 형태의 불교는 거부하셨습니다.

불교가 철저히 진리를 증득하기 위한 종교이고 다른 종교와는 달리 현실 속에서 살아있는 지혜를 터득하기 위한 종교임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의 이해와 어떻게 일상의 삶 속에서 파고들어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진리를 전해줄 것인가 하는 실천의 문제는 변화하는 시대와 사회상황 속에서 융통성 있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21C에 살고 있습니다.

얼마전 인간의 유전 정보를 해독하려는 '인간 게놈 Project'가 완성되었다고 공포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불교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업과 연기설을 바탕으로 모든 생명의 존엄성과 불성을 강조하고 있는 불교 입장에서 볼 때 생명공학의 빠른 변화는 불교 교리 자체에도 적잖은 논란과 고민거리를 안겨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말로만 들었던 게놈 Project란 무엇인지. 그로 인해 파생된 문제점은 무엇인지 인류전체를 위협할 수도 있는 생명공학 시대에 불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996년 생물학상 일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연구소에서 윌머트라는 생명공학자가 양을 복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원래 생명의 탄생은 정자와 난자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지죠. 근데 난자와 정자의 결합이라는 성세포의 결합을 통해서가 아니라 체세포에 의한 핵 이식법에 의해 똑같은 유전자 구조를 가진 '돌리'라는 양이 탄생한 것입니다. A라는 미수정난자에는 A라는 생명을 형성시킬 유전자가 들어있는 핵 세포가 있습니다. A라는 수정난자에서 유전자를 지닌 핵 세포를 제거해 버리고 껍데기만 남겨 놓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B라는 수정난에 있는 핵 세포를 이식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A라는 수정난에 B와 동일한 구조의 유전자를 가지게 되고 B와 동일한 생명의 탄생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세포에 들어있는 유전자 정보에는 그 생명체를 형성하고 모든 것을 결정짓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것을 모두 해독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생물의 어떤 부분의 세포를 가지고도 그 생물과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새생명을 복제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콩팥에 있는 세포하나로서도 그 사람의 생명 전체를 분석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끼손가락의 피 한 방울로도 그 유전자 구조를 통해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거죠. 대단하지 않습니까?

쥬라기 공원이 단지 영화에만 있는 얘기가 아니라 화석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피나 체액만 얻을 수 있다면 공룡의 복제란 현실적으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구분하듯 인간의 역사를 돌리 이전의 시대와 이후의 시대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획기적이고 혁명적이라는 거죠.

게놈이란, DNA를 담고 있는 그릇에 해당되는 염색체 Set입니다. 인간의 세포 한 개에는 46개의 염색체 즉 46개의 DNA가 이중의 나선형 구조로 들어있고 여기에는 30억 개의 염기배열이 가능합니다. 이 염색체의 염기배열이 어떻게 되어있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목소리, 성질, 피부 등이 다르게 나타나고 차이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게놈 Project란 30억 쌍의 염기배열을 모두 분석해낸 것입니다. 이 Project의 완성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유전자들이 염색체의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지 그들의 기능과 작용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다시 말하면 세포 단계에서 미리 태어날 인간의 모든 것, 즉 육체적 조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성향, 지능, 뒷날 걸리게 될 병까지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알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을 조작할 수 있다는 말이죠. 공식적인 발표로 2030년쯤에는 두뇌의 상세지도를 완성하여 원할 경우 지능이 높은 두뇌를 가질 수도 있게 된다고 합니다.

동국대 호진스님은 『불교평론』에 수행의 개념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글을 실었습니다. 의욕은 있는데 몸이 안 따라가서 책만 펴면 졸음이 오는 스님, 수행의 최대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나태한 게으름을 극복치 못하는 스님, 난 정말 해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스님들은 수행이 잘된 큰스님의 세포를 구해 DNA를 재구성함으로써 수행의 극적인 결과를 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공급받듯 상점에서 원하는 업을 구입할 수도 있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왠지 솔깃하지 않으십니까?

물론 이 이야기는 호진스님 개인의 상상에 불과한 것이지만 완전히 허황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미 미국에선 아시다시피 지능이 높은 사람의 정자와 미인의 난자 등이 고가에 팔리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니까요.

수행자는 수행을 통해 본래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본성을 되찾아가고 있는 반면 과학자들은 과학이 할 수 있는 연구와 실험을 통해서 생명의 본성에 다가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두 분야는 분명 어느 한 지점에선가 만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불교계에서 관심과 연구 속에서 불교적 진리를 채 부합시키기도 전에 자본과 욕망의 논리에 의해 마구 남용되어 버린다는 거죠.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을 이용하는 자본의 속성상 인간은 개발된 기술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전적 암호를 조작하거나 재구성하게 될 경우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적 발전이 중단되는 위험과 복제된 생명체가 방출될 경우 생기는 유전자 오염 등 우주 질서의 파괴의 위험을 안아야 함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조작과 복제 생명 출현에 대한 불교 나름의 윤리적 제동장치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문제는 유전자 조작에 대한 인간이 자신의 業을 부정하는 데서 오는 것 같습니다. 또한 업이란 것은 어떠한 환경에서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복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는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인간은 全生을 통해서 자신의 업을 만들어내고 현생의 삶을 만들어 냅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의지적 행위,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생은 나에 의해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는 나의 삶입니다. 그럼에도 우린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삶에 침흘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업을 짓고 있죠.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행위로 이루어진 크고 작은 업들을 현대적 가치 기준과 욕망으로 회피하고 재조작하려다 인류는 생명의 질서 파괴라는 거대한 재앙의 과보를 만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기계공학과 화학공학은 물질을 변형시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얻으려 하고 있습니다. 과연 지금 현 인류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무병장수나 무한히 연장되는 삶 자체가 아니라 고통스런 삶의 고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닐까요? 이는 철저히 외적인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 즉 무집착에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결국 유전자 조작은 생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삶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고 복제인간은 윤회의 굴레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복제된 인간을 추가시킬 뿐이라는 거죠. 나 하나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운데 동일한 업을 지닌 복제인간까지 나온다 생각해 보십시요. 인류전체로 볼 때 업의 무게가 배가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결국 인간은 또다시 집착으로 인해 또다른 윤회의 굴레와 그에 따른 과보를 수반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는 과학과 불교가 해후하는 시대라 합니다. 생명과학의 바른 자기매김을 위해 불교와 과학을 동시에 알 수 있는 학자의 양성이 필요한 때이기도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불교는 보이지 않는 무엇을 믿으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사물의 실상을 밝게 보라는 지혜의 종교입니다. 앞으로만 치닫고 있는 과학과 물질문명에 지혜의 눈을 달아주어 인간의 본원적 삶을 방해하는 전도된 가치관, 전도된 삶을 바로 잡아주어야 하는 것이 개인적인 수행과 더불어 21C를 사는 젊은 수행자들이 안아야하는 새로운 임무가 아닐까 합니다.

이제 인류의 가장 큰 과제는 정신문화 계발, 즉 인간의 본래마음인 참성품을 어떻게 획득하느냐에 모아지고 있습니다. 이 명쾌한 진리 앞에 더 높은 이상을 향하여 더 넓어진 마음의 문으로 더 깊은 애정으로 세상 만물을 스승 삼아 21C의 구도의 길을 걸어가 봅시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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