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도 나무와 이별하며 온몸으로 무상을 알려주는 계절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대교반 탄연입니다. 저는 나의 자산 이라는 주제로 저의 수행에 언제나 귀감이 되는 노스님의 가르침을
대중스님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저는 아주 어려서부터 어머니 보살님의 강압으로 매일 108배를 해왔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순응했지만 사춘기에 접어들자 매일하는 108배는 제 인생
최대 고행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몸이 재산인 무용 전공을 핑계로 변명거리를 만들어 노스님을 친견하러 갔고 많은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엉뚱한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매일하는 108배 때문에 불필요한 허벅지의 앞 근육이 발달되는 것 같아 고민입니다.”
만약 대중스님들이 이런 당혹스러운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답변을 해주실 건가요?
노스님의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경상남도 대표 무용수라고 들었는데, 그러려면 하루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노력 했을까요. 어린나이에 아주 훌륭하십니다.
그런데 108배 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요?”
저는 “7분이요” 라고 답했습니다.
“하루 24시간은 1440분입니다. 그중에 필요한 근육을 만드는데 쓰는 상당수의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일부 시간 중에서의 7분입니다. 그 7분이 네 근육에 그렇게 많은 영향을 끼칠까요?
저는 순간 벌거벗은 사람이 된 것처럼 창피했지만, 동시에 뚱딴지같은 질문에도 지혜로운 답변을 주신 노스님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저희 노스님께서는 시간 계산법을 좋아하시는지, 출가 이후에도 말씀하십니다.
“탄연아 한평생 공부해도 진짜 얼마 못한다. 자야지, 밥 먹어야지, 씻어야지, 주변 정리도해야지.
탄연아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 1만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법칙이 있단다.
바깥사람들도 각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1만 시간을 투자하는데, 우린 수행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하루에 몇 시간을 투자해야 될까. 계산 좀 해보거라.”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열심히 시간 계산을 했습니다.
하루에 3시간을 투자하게 되면 10년, 하루에 1시간을 투자하면 30년이 걸립니다.
제가 만약 80세까지 산다면 70만800시간이 주어집니다. 하루 평균 6시간만 잔다고 해도 20년,
밥 먹고 씻는데 필요한 최소의 시간을 대입 해봐도 10년 이 걸립니다. 제가 만약 독경이나 기도
또는 염불을 하루에 한 시간씩 죽을 때 까지 한다고 해도 고작 3년 이란 시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덕과 시주의 은혜를 빌려 살아가는 제가, 과연, 몸으로는 앞서 말한 평범한 일상을 보내며
입으로는 생사윤회를 뛰어 넘어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수행자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또 노스님의 영향으로 예불, 목탁, 대종 등 모든 예식에 있어서 1분도 늦거나 빠름 없이 언제 어디서나
정확히 제 시간에 해야 된다는 개념이 아주 강력히 새겨져 있습니다.
“탄연아 우리가 어떻게, 남-녀-노-소 ,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모든 사람들에게 절을 받으며 공경 받을 수 있는 줄 아느냐?
그건 이 모든 만물에게 우리가 늘 회향하기 때문이란다.
동물, 미생물들에게는 시계와 시간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늘 같은 시간에 쳐주는 목탁소리, 요령소리, 대종소리가 그들에겐
삶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실수로? 또는 핑계로? 늦게 치거나 빨리 치는 일이 생긴다면 그로인해 그들은 일상의 흐름이 파괴되어 목숨까지 잃게 될 수도 있단다.”
(이 말을 듣는데 정말 섬뜩 했습니다.)
노스님께서는 우리가 미생물, 허공, 일체 삼라만상에게 늘 회향하고, 그들은 자연에게 회향하며 자연은 또 다시 인류에
회향하고 그렇게 돌고 돌아 이루어지는 것 이라며, 공경 받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이 모든 만물들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제 시간을 정확히 지킴으로써 마음대로 하고 싶고, 게으르고 싶은 중생의 습관을 차단해 준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언제나 편하고 싶은 육체의 마장이나 특히 내가 하기 싫은 것에 있어서는 팔만 사천 가지의 타당한 변명이 따릅니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행을 꾸준히 행함으로써, 게으르고 싶은 습관을 막고 타당했던 변명거리들이 물거품과 같음을
여실히 알게 됩니다.
이렇게 아주 사소한 것 같은 일상에서의 꾸준한 행과, 정확한 시간을 지킨다는 것은 마치 계곡 물의 흐름을 잡아주는
돌멩이와도 같이 업의 방향을 계속해서 틀어주며 동시에 “나”라는 상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생활 속 계율로 확립이 되어, 스스로를 통제함으로써 주체적인 수행의 기본 자산이 됩니다.
작년 겨울, 저는 무슨 복에서 인지 회주스님의 시자를 살게 되었습니다.
회주스님의 위대함은 마치 향을 쌌던 종이처럼 그 향기가 일상 속에 배어 있었습니다.
일분일초를 아끼시며, 늘 시간을 지키시는 모습, 매일 한결같이 반복 하시는 정진을 통해 모든 일에 대하여
어떠한 분별 망상도 일으키지 않으심을 곁에서 보았습니다.
이 모습이 노스님께서 제게 주신 가르침과도 일맥상통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옛 어른스님들의 평범함 일상을 닮아 가기위한 노력이야말로 수행자의 진정한 자산이 아닐까요?
대교반이 된 이제야 되돌아보니 강원생활이 이러한 수행에 있어 최적의 환경인 것 같습니다.
늘 같은 시간에, 같은 행을 반복하는 ‘금쪽같은 되돌이표 일상’ 기상, 도량석, 예불, 공양, 상강례, 수업, 입선 등...
짜여져 있는 시간을 수동적으로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를 지니고 바른 언행으로써
바른 생활을 늘-반복하여 꾸준히 해나간다면 강원생활 자체가 정정진이며,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팔정도’가 아닐까요.
끝으로 한 에피소드만 말씀드리고 법문을 마치려 합니다.
운문사에 입방하여 대중생활을 익힐 때 정말 하루하루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곳에서 4년을 보낸 그 자체만으로도 화엄반 스님들이 너무 존경스러웠습니다.
조심스럽게 비법을 알려 달라고 하니 “버티는 게 이기는 거야” 라는 답변이 왔습니다.
그 후로 “버티는 게 이기는 거야 사바하” 진언을 하루에 몇 십번을 해도 해결이 되지 않자
저만의 비법을 창조해냈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법당에 가서 부처님께, 신중님께, 53선지식께, 삼배를 올린 후에, 수행의 처음이자 끝이며,
강원생활의 시작과 마지막을 함께 하는 도반들 즉, 살아계신 화엄반 열아홉 분의 부처님께 감사의 절을 올립니다.
현근부처님...여목부처님....선덕부처님...
치문 때부터 꾸준히 해본결과 “버티는 게 이기는 거야 사바하 ”진언의 위력도 상당했지만, 제가 개발한 백씨불부터 막내불에 이르는 불 명호를 부르는 위력 또한 상당하니 애용해 보시길 바랍니다.이것이 저의 자산이고,
이 자산을 졸업을 앞둔 제가 후배스님들에게 드리고 싶은 선물입니다.
경청 해 주신 대중 스님들 고맙습니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