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띄 . 엄 . 띄 . 엄 .-치문반 승연

가람지기 | 2021.07.18 06:44 | 조회 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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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문반 승연

 

몇 년 전, 지리산과 섬진강이 서로 이어 달리는 마을로 귀촌을 했었습니다. 이사하면 당장 급히 알아 두어야 할 곳이 면사무소와 쓰레기 분리수거장입니다. 마침, 집 옆 면사무소 마당에 분리수거장이 있어서 편리하게 이용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분리수거장 바닥에 빨간색 스프레이로 이런 글이 써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환경미화원을 띄엄띄엄 보지 마시오. 아무데나 버리다가는 큰 코 다칠테니.”

 

분노가 꿈틀되는 글씨였습니다. 그때 맥락상 띄엄띄엄은 하찮게또는 속된 말로 우습게라는 의미로도 쓰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법문의 제목은 훌륭하지 않다는 뜻에서 띄엄띄엄이고 원래 뜻 그대로 간격을 띄워있다는 의미에서도 띄 엄 띄 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법문 듣는 청중에게 부족한 빈칸을 메워달라는 당부인 것입니다. 부디, 그리고 감히 당부 드리니…….

 

화엄사 계곡을 따라 지리산을 오르노라면, 한 시간 채 안되어 암자가 나타나는데 입구에 입차문래 막존지해 入此門來 莫存知解 라는 굵은 글씨가 써진 비석이 있습니다. 이 산문에 들어서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글귀가 선가귀감에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엊그제 사집반 스님들의 논강을 귀동냥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잠시 자를 잠시 그치라는 뜻으로 그칠지로 해석을 바꾸어 봅니다. 최소한 산문 안에 들어서는 동안만이라도 멈추어 보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그렇게 ,(쉼표)로 제식으로 띄어 읽습니다.

 

높은 산을 오르기 전 암자에 들러 빈 물통도 채우고 산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잠시 생각도 내려놓습니다. 멈춘다. 사이를 둔다. 그때 다른 이가 들어설 여백이(공간이)생겨납니다. 나와 남의 구분은 무엇입니까? 내 쪽에다 선긋기하고 장벽을 쌓는 것입니다. 그렇게 접근금지를 선언합니다. 차별을 두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다 남이다 그러나 장벽에 빵꾸 뽕하나 내어보면 그 다음다음이 무너지는 일은 매우 쉽다고 마치 손바닥 뒤집기처럼 쉽고 재미있기조차 하다고 은사스님께선 항상 입이 닳도록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이시기를 나 없이 살라는 게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없다고! 가끔 남에게 져보는 것도 방법이다. 그래봐야 이기고 질 나도 없다고,,,이기고 질 나도 없으니 두려움도 없다고.

 

운문사 서점 뒤편에 자비구생慈悲求生이라는 제목의 벽화가 있습니다. 부처님 전생담 이야기 하나, 비둘기 이야기입니다.

다급히 사냥꾼에게 쫓기던 비둘기 한 마리를 수행자가 숨겨주었는데 뒤쫓던 사냥꾼이 내어놓으라고 재촉하자 수행자는 비둘기 무게만큼이면 되겠느냐며 그 만큼에 해당하는 자기 살을 떼어 내어줍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살을 떼어내도 비둘기 무게에 미치지 않아 결국 온몸이 저울에 올라가고 나서야 비로소 비둘기 무게와 균형이 맞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어떤 일에 조금 마음을 내다보면 그 다음 경계가 바로 닥칩니다. 그 경계를 넘어설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망설임. 한 발짝 더 내딛다 보면 또 더 많은 마음과 시간을 요구받습니다. 결국 어느 정도 하고 손을 뗄 것인가 말 것인가 갈등구조로 내몰리게 됩니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여기서 되돌아서는가 아니면 나를 담대하게 내던질 수 있는가의 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반야심경은 처음부터 핵심을 짚고 있습니다.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보고 고통의 바다에서 건너느니라곧 고해를 건널 수 있는 것은 란 실체가 없다는 것을 간파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공함을 알 때 타인을 위한 배려심과 자비심이, 제대로 흘러넘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기심 없는 배려심은 상에 머무르지 않는 배려심이고 이를 일러 불교학자 홍창성교수는 끈적임 없는 쿨cool한 배려심으로 표현하면서 무아를 체득한 자비심이라야 타인에 대한 진정 사심 없는 배려가 가능해지고 연기의 가르침을 사회적 관계로 연장하여 이해한다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까지 배려심과 보살피는 마음이 미칠 것이다. 그래서 무아와 연기에 대한 깨침이 사심 없는 자비심을 베풀 수 있는 원천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그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 우리의 아픔이 되고 그들의 고통이 나와 우리의 고통이 되어 자비행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공감의 너울이 내게로 파도쳐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연기를 보는 자 나를 볼 것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띄엄띄엄한 법문을 끝까지 경청해주셔서 고맙습니다. cool한 저녁시간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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