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수행의 근본분열(진표스님)

운문사 | 2005.12.26 13:22 | 조회 2941

아직까지 소매 끝에 스치는 찬 기운이 남아있어 그나마의 낮 땡볕을 견딜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 익어가는 산딸기의 빠알간 빛과 버찌의 검은 빛 향기로움이 고개 들고 쳐다보는 얼굴마다 흐뭇한 미소를 짓게하는데, 도량에 가득한 밤꽃향기 흰고무신 코 끝에 묻어나는 요즘, 대중스님들이 바쁜걸음으로 도량 곳곳을 살피며 운력을 하는 가운데 며칠 전 학인스님들의 장검사가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익숙해진 듯 모여들어 주변에 널려있는 짐들을 다락장, 정통, 경상서랍 심지어 운력가방, 책통까지 스스로 들춰보는 봄, 여름철의 통과의례였지만, 잠깐 지나치는 상념속에 머물던 부끄러움은 없었는지요?


자석 끝에 이끌리는 철가루 마냥 생활의 주변엔 수많은 것들이 널려있고 머무는 곳마다 자욱 자욱 먼지가 쌓여갑니다. 습관처럼 널부러진 물건들과 생활방식들을 절집에 들어와 다 버린 듯 하다가 유치원생처럼 한걸음 한걸음 중물을 들이다보니 또다른 관습에 젖어 버렸습니다.

가끔은 수행의 척도를 어디에 두어야할지 스스로 고민도 해보고 중노릇 잘해야겠다며 욕심도 내보며 이것저것 저울질로 나와 남의 시시비비를 가리다 허탈하게 해답이 나오지 않을 때 대중스님들께서는 어느 곳에 잣대를 드리우십니까?


익히 아시겠지만 십사비법十事非法이 있습니다. 2차 결집을 열리게 하고 대중부와 상좌부로 승가의 근본분열을 일으키게 했던 열 가지 법답지 못한 일. 밧지족이 세운 상업도시 국가로 그 당시 화폐경제가 발달되어 경제적으로 부유한 베살리 지방에서 머물던 비구, 비구니들은 이미 그 번영에 발맞추어 수행생활도 진보적이었겠지요. 야사 비구에 의해 거론되었던 베살리 승단의 열가지 비법이란, 남은 음식에 관한 것, 소금 저장, 승가 운영, 술과 돈 등이었습니다.

사실 전 그 문제건에 대해 옳고 그르다는 결론을 내리기 이전에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게 있었습니다. 소금을 저장해두고 먹거나 공양시간에 어느 정도 여유를 둔다는 것, 이미 화폐 경제가 발달된 시대에 돈의 보시를 받는다는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 보면 별스럽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장검사로 학인스님들의 다락장에서 발견된 CD PLAYER나 카세트 테이프 또한 시대가 흐르면 정말 별스럽지 않은 문제일 것입니다.

시대의 흐름과 수행처에 따라 달라지고 변형된 모습은 우리가 이렇게 가사 장삼을 두르고, 후원에 가마솥을 걸어두고, 땅을 일궈 농사를 지으며, 청풍료를 지어 수행하는 모습에서도 여실하게 들여다 볼 수 있으니까요.


베살리 승가에서 태양이 남쪽 하늘로 기울어진 다음에도 자신의 그림자가 두 손가락(엄지와 검지)의 길이 사이에 머무는 동안은 공양을 허락하면서 스스로에게 그 정도의 여유를 주기 이전에 먼저 자기 수행의 디딤돌에 근본분열이 일어났던 게 아닌가 여겨봅니다.

손가락 한 마디이든 두 마디이든 그 30여분의 시간을 가지고 논쟁하는게 그리 중요했겠습니까? 이미 부처님 당시의 교법과 계율로만으로는 자기 자신의 수행력을 견고하게 유지할 수 없었고, 그런 작은 생활의 시비거리가 일대사를 해결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여겨졌을 테니까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개 장검사에 우리는 그것이 마치 수행과정의 공부단계인 것처럼 얼굴을 붉혀 흥분을 하고 열성을 쏟아 '된다, 안된다' 시비를 하며 울컥울컥 솟구치는 감정의 부당함과 억울함에 휩싸여 버리고 맙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십시오.

부처님 당시의 교법과 계율을 드리웠을 때 우리 주변사 중 무엇이 타당하고 무엇이 부당하겠습니까?

내가 처음 출가할 때 세웠던 순수한 믿음의 힘으로 매진하다보면 주변사에 따라오는 것은 부수적인 면이지 주가 될 수 없습니다. 십사비법은 물론 십계 중 오후불식의 계율이 무색하게 살고 있는 지금, 진실로 우리가 시비해야 할 것은 널려진 주변사가 아니라 수행의 근본이 되는 견고한 믿음, 실천하는 원력이 아닐런지요. 한 번쯤은 부끄러운 듯 내 수행의 근본분열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돌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대중스님들의 마음은 어느 곳에 머물고 있는지요?

전세계적으로 달아오른 월드컵의 뜨거운 함성과 열광하는 붉은 빛 물결을 따라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벅찬 희열을 느끼셨다면 이젠 내 수행의 분열된 부실공사를 찾아 가슴 뿌듯한 진보적 개혁을 단행해 보심은 어떻겠습니까?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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