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지혜자비와 업(지공스님)

운문사 | 2005.12.26 12:55 | 조회 3877

『보살마하살이……植衆德木하여 以慈修身하야 善入佛慧하며

通達大智하야 到於彼岸하며……』

이 구절은 법화경 서품에 나오는 글입니다.

『見自心性하여 用如幻悲智하야 還度衆生하리라』는 계초심학인문에서, 또 치문의 『알浮情 誡邪業 以軌乎正道』를 배우며 저는 자비와 업에 대해서 그동안 살아오며 느끼고 체험한 것을 토대로 치문반 첫 철에 주어진 차례법문에 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행에 따르는 이론을 논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저 역시 행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뜬 구름 같은 이론을 제시해야 하는 점에 곤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만 항상 생각을 두고 있는 바라, 제게 주어진 이 시간 이 공간에 대한 법인연에 대해 감사히 생각합니다.

저는 初心을 배울 때 『용여환비지用如幻悲智』의 해석에서 항상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 하였습니다. 해석하시는 모든 스님이나, 해석책마다 되어있는 『환과 같은 비지悲智를 써서』라는 해석이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불교사전을 보던 중 『불교는 지혜와 자비를 진리로 한다』는 내용과 만나고, 자전에서 '幻'이 '요술처럼 바뀌다'라는 속뜻이 있는 것을 보며 머리 속이 정리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悲智는 결코 幻일 수 없다는 저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해석을 정리하면 『자신의 심성을 보게되면 요술처럼 바뀐 悲智를 중생구제에 되돌려 쓰다』는 의미가 됩니다. 즉 자신의 마음자리를 보게 되면, 시절인연을 마나나게 되면 가득찼던 탐진치는 요술처럼 순간에 녹아 내리고 자비와 지혜의 모습으로 바뀐 전혀 다른 모습의 자기로 변해있음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법화경 왕사성 기사굴산 중에서 일만 이천인 아라한 내지 마하파자파티 비구니와 라후라의 어머니 야수다라를 성불시킨, 다시 말하면 비구니를 성불시킨 것은 무엇일까요?

'자慈로서 몸을 닦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분명히 많은 비구니들이 성불했음에도 불구하고 비구니는 성불할 수 없다는 자기 암시에 빠져있는 오류는 어디서 나왔으며 왜 나와야 했을까요? 여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모성애를 갖고 태어납니다. 모성애는 '자慈'입니다. 신체적으로 남자는 9규로 태어나고 여자는 십규로 태어납니다. 10은 완벽의 숫자입니다. 그리고 시방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가집니다. 생성시키는 근본으로서, 생명의 원천으로서 법계와 허공계입니다.

성불은 마치 복권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장난으로, 재미삼아 동전으로 긁어보면 행운의 숫자나 경품에서 꼭 하나씩 전혀 다른 것을 게워 놓아 그 행운을 놓치게 해두었습니다. 분명히 당첨되는 것도 있을텐데 저는 피해가는 것입니다. 이미 복권에 당첨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태어나지만 '자애'라는 '성불'의 행운에 우리가 세세생생 만들어 온 '업'이 결격사유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그 '업'이라는 것만 자리바꿈을 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성불이라는 행운(?)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라는 동화를 배웠습니다. '업'이란 우리가 세세생생 윤회하며 얼려온 얼음덩이라고 생각합니다. 얼음을 녹이는 것은 따뜻함 밖에 없습니다. 지혜의 자비로서 작은 선이라도 윤회의 인이 되지 않는 보시와 사섭(보시·애어·이행·동사섭)으로써 '업의 얼음'을 녹이고, 박빙薄氷이 되어 어느 날 살 짝 건드리기만 해도 깨어져 깨어진 얼음 사이로 비치는 맑은 물위에 환히 떠있는 달을 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남의 손가락으로 보는 달이 아니라 고개를 듦으로서 허공에 있는 달을, 달의 본체를 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견성성불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으로서, 무루無漏의 커트라인(cut-line), 수평에 도달하기 위해 먼저 업을 녹이는 작업이 더욱 중요하리라 봅니다. 보통 우리는 "나도 구제 못했는데 남을 구제한다고?" 라고 합니다. 그러나 남에게 자비심을 행하며, 스스로에게는 알浮情 誡邪業하여 자신을 다스리는 동안 어느 새 업의 얼음 녹아버리고 성불의 수면을 밟고 서 있는 시절인연을 만나게 되었다, 하는 그런 일은 없을까요.

저는 앞에 앉은 짝인 부반장 스님의 젊고 빛나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 시절엔가 지나가 버린 나의 모습이거니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만 여러분들은 저의 모습을 보며 저렇게 많은 나이로 어찌 출가했을까하고 염려하십니다. 젊은 스님들 여러분!! 저는 수계하러 가서 『사미니율의』의 우바리 존자의 서문을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젊은 출가자 만큼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젊은 스님들은 항상 젊은 날만 있으리라 막연히 느끼고 살지요. 가보지 않은 또 하나의 길에 대해 그 길을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는 날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면 뭔가 다른 무지개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어쩌다 계실지도 모릅니다. 제가 이 나이 들도록 밖에서 살아온 것을 생각해보면 그 시간 그 공간에서 만나져야 할 일이라면 어디를 가도 흡사한 일을 당하고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반 젊은 스님들은 제게 말합니다. "힘들 때는 스님을 보면 반장스님도 저렇게 하는데 젊은 내가 힘들어하다니…" 하고 스스로 경책한다고 합니다. 늦깎이로서 학인으로 들어온 저를 보시고 여러 학인스님들의 발심이 더욱 굳어지게 하는 시멘트 역할을 할 수만 있어도 이 시간 이 공간을 함께 하는 동업중생으로서의 제 몫을 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자비스러움, 지혜를 갖춘 자비스러움을 충분히 발휘할 때 성불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성불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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