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초발심(고진스님)

운문사 | 2005.12.26 13:04 | 조회 3315

연둣빛 새싹이 돋아나는가 싶더니 여름을 알리는 6월입니다.

여름은 성장의 시간입니다. 가을에 결실을 거두기 위한 준비의 시간들입니다.

운문사에서의 일 년, 치문을 지내고 사집 첫 철을 보낸 저는 마치 어른이라도 된 듯이 우쭐해지곤 합니다. 이렇듯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언제 내가 여기까지 와 있는가 싶어 뒤를 돌아다보게 됩니다.

예전에 노스님께선 제게 이름처럼 중노릇 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고(古) 참진(眞)' 바로 저의 법명입니다. 대중스님!! 고진, 참 근사한 이름 아닙니까? 거기다가 반스님들이 지어준 아주 괜찮은 별명까지 있습니다.

행자시절 저는 초발심을 배우면서 참된 중노릇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곤 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저는 이 다음에 커서 무엇이 될 거예요, 라고 자신 있게 말을 하듯이 저 또한 중노릇이란 이렇게 하면 되겠지, 라고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보기도 했으니까요.

치문 서(序)를 외우고 우리가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습의를 통해 반복되는 시행착오를 하면서 훈습과 경책이란 단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있었습니다. 긴장된 시간들이 차츰 익숙함으로 길들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참된 중노릇이 이렇게 생활에 길들어지듯 익숙해지면서 퇴색된 모습으로 제 안에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보다는 옆에 도반스님을 먼저 생각하고 챙겨주던 마음이 나를 먼저 생각하게 하고 조금만 힘이 들어도 얼굴색이 변하게 됩니다. 출가해서 청정한 대중에 참여할진댄 항상 부드럽고 화합하고 착하고 수순할 것을 생각할지언정, 이란 말씀이 무색하게 제 마음속에는 언제부터인지 모든 기준이 나를 중심으로 내 기분에 좌우되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무엇을 하든지 하심(下心)하며 수순하게 따르던 일들이 불과 몇 해 지나지 않은 지금, 내 생각만을 내세우는 고집불통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건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웠다는 알음알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엇인가를 배웠다는 사실과 함께 초심에서 배웠던 것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초심(初心)에서 우린 『경행할 때는 옷깃을 열고 팔을 흔들지 말라』고 배웠지만 우린 팔을 흔드는 것은 물론이고 도량 곳곳을 뛰기까지 합니다. 청풍료에서 정랑으로 정통에서 후원으로 심지어는 법당에서 나올 때마저도 뜁니다. 어른스님께 번호가 적히게 될지도 모를 위험부담을 안고서 아주 용감하게 말입니다.

공양할 때는 마시고 씹는 소리를 내지 말고 잡고 놓을 때는 차근차근 조심스럽게 하며 묵묵히 말이 없어야 한다』고 했는데 우린 시끄럽습니다. 시끄러운 건 지대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사람만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하지요. 저희들이 깬 접시의 양은 얼마나 될까요. 제 발 밑에 깨진 접시가 있다면 떠드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이루고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자세로 배워 익히고 행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너무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첫발심 했을 때 우리의 마음자세를 기억하십시요. 처음 마음을 잊지 않고 아는 것만큼 실천하는 수행자, 늘 초발심으로 빈 마음 되어 새롭게 한 발 내디딜 수 있는 진정 살아있는 수행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수행이란 적어도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사는 것이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모습을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지금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참 수행이라 할 것입니다. 끝으로 「백유경」의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토끼 한 마리가 도토리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도토리 하나가 머리 위에 떨어지자 깜짝 놀란 토끼는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토끼들도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본 다른 산짐승들도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고 함께 뛰기 시작했습니다. 사자가 정신없이 뛰는 그들에게 어디를 향해 가느냐고 물었을 때 서로 쳐다만 볼 뿐 아무 대답도 못했습니다. 가는 곳도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정신없이 뛰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찾지 못한 채 바쁘기만 한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살아가면서 가끔씩 자신을 뒤돌아 비추어 보며 첫발심 했을 때의 입지(立志)를 생각하면서 부단히 정진합시다.

성불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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