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이 모두 지고 난 가냘픈 가지 꼭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바람 따라 뱅그르르 도는 못난이 홍시가 무척이나 외로워 보이는 날입니다. 회색빛 하늘 아래로 함박눈이 펑펑 내릴 것만도 같은데… 오늘의 이 차례법문이 끝나고 나면 밤새 눈이 하얗게 내렸으면 하는 바램으로 얼마전 골깊은 산사에 내린 첫눈과 그 설경의 아름다움을 마음속에 담아 그 따사로움의 여운으로 이 겨울밤 법문을 시작할까 합니다.
대중스님들께 '들국화의 향기'라는 잔잔한 한 토막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해서 오늘 이 큰자리에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올라왔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제 자신은 물론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대중스님들께 묻습니다.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대중스님들은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고 계시는지요.
외딴 두메산골에 한 포기의 들국화가 피어 있었습니다. 누구하나 기다리지 않고 누구하나 반겨주지 않는데 꽃을 피우게 되었죠. 들국화는 투덜거렸습니다.
"이런 두메에서는 애써 꽃을 피울 필요가 없어. 그저 억새로나 하얗게 흔들릴 일인데…"
이때 곁에 있던 돌 부처님이 이끼가 파랗게 낀 입을 열었습니다.
"나도 있지 않느냐? 들국화야."
들국화는 몸이 움츠려지면서 말을 했습니다.
"나는 덤덤한 당신이 싫어요. 철이 지났지만 멋쟁이 나비라도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어 요. 아니면 어여쁜 소녀의 가슴에라도 꼬옥 안겨가고 싶은데… 이런 제 신세가 뭐예요? 이렇게 하염없이 피어나서 하염없이 져버린다는 것이 너무도 억울해요."
돌 부처님은 비바람에 마모된 눈으로 그윽히 들국화를 바라보았습니다.
"들국화야, 이런 것은 생각해보진 않았니? 우리가 이 들에서 기도함으로 이 세상 누군가 가 받을 위로를 말이야."
돌 부처님은 먼 하늘의 노을한테로 눈을 준 채 말을 이었습니다.
"우리가 밤하늘의 이름 없는 별들처럼 외딴 자리를 지킴으로 해서 이 세상이 그래도 태양 을 좇아갈 수 있는 거란다. 그리고 이 세상의 빛 또한 아직 꺼지지 않는 것은 산천의 꽃 들이 도회의 쓰레기보다는 많기 때문이란다."
부처님은 이끼 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습니다.
"부처님은 언제부터 그런 마음으로 사셨어요?"
"천년도 더 되었단다."
"천년이나요?"
들국화는 부처님에게로 살포시 몸을 기댄 채 말을 했습니다.
"나의 향기를 받으세요. 부처님."
지금도 어디에선가 서로를 의지한 채 그들의 주위를 밝히며 세상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수행자의 모습도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 수행자의 진실된 삶 속의 작은 실천들의 모습 하나 하나가 쌓이고 쌓여 그 속에서 배어 나오는 은은한 '수행자의 향기'는 무언으로 세속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닐까요.
벌써 한해가 가고 12월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살림살이를 돌아보고 수행자답지 못했던 모습이 있었다면 저는 물론 대중스님들 또한 함께 경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두서 없는 글로 대중스님들을 뇌롭히지는 않았나 하는 조심스런 마음으로 두 손 모아 부처님 전에 작은 기도문을 올리며 이 자리를 떠나고자 합니다.
매일 우리가 하는 말들과 행동에 향기로운 여운을 남기게 하소서.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자비의 말을 하게 하시며
남의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을 먼저 보는 긍정적인 말을 하게 하소서.
매일 정성껏 물을 주어 한 포기의 난초를 가꾸듯이
침묵과 기도의 샘에서 길어 올린 지혜의 맑은 물로
우리의 말씨 가다듬게 하시고
겸손의 그윽한 향기 그 안에 스며들게 하소서
그날그날 같은 평범한 일상에서도
새롭게 이어지는 고마움이 기도가 되고
작은 것에서도 의미를 찾아 지루함을 모르는
기쁨의 수행자가 되게 하소서.
말없이도 다른 사람들을 감화시킬 수 있는
자신을 맑히는 수행자가 되게 하시고,
오늘은 지상에 충실히 살되 내일은 홀연히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수행자가 되게 하소서.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