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운문사 도량안내(지현스님)

운문사 | 2005.12.26 13:12 | 조회 3432

온 도량이 깨끗하여 더러운 것 없사오니

삼보님과 천룡님네 이 도량에 오시도다.

나무아미타불


먼저 법문에 들어가기 전에 대중스님들께 여쭤보겠습니다.

운문사에는 다른 사찰과 비교했을 때 흔하지 않은 몇 가지가 있는데 무엇인지 혹 대중스님 아십니까? 아신다면 한번 이야기해 주십시오. 작압전, 윤장대, 악착보살, 처진 소나무, 황금빛 은행나무, 용트림하는 대추나무… 다 좋습니다. 제가 오늘 이야기할 내용이 그 가운데 다 있는 것 같습니다.

도량안내를 맡았거나 현재 맡고 있는 화엄반 스님은 잘 알고 있겠지만 운문사에 살고 있으면서도 관람객 또는 신도들이 물어 왔을 때 선뜻 이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스님이 관연 몇 분이나 될까요. 실례로 저희반 스님들 중 크고 작은 질문들을 받은 예가 있습니다. 작압전이 왜 다른 법당과는 달리 작압전이라 하는지, 삼성각의 칠성탱화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은 어떤 부처님인지에서부터 사물은 왜 치는지 등…….

오늘 제가 작압전, 윤장대, 악착보살 등을 주제로 법문을 하게 된 이유는 "隨處作主 立處皆眞(수처작주 입처개진)"이라는 말이 있듯이 적어도 우리가 운문사에 살면서, '여기는 우리 절이 아니야' 또는 '4년 후 졸업하면 갈텐데'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지 말고 애정을 가지고 어느 누가 무엇을 물어왔을 때 당당하고 분명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주인의식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러한 법문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대웅전에 가면 윤장대가 있습니다. 전륜장, 전륜경장이라고도 하는 이것은 경전을 넣는 책장에 축을 달아 회전하도록 만든 나무로 된 책장입니다. 윤장대는 경장의 일종으로 경장은 비단 경전뿐만 아니라 율과 논 그리고 여러 고승들의 소초도 함께 넣어두는 곳입니다. 티벳에서는 윤장대를 축소시켜 휴대할 수 있도록 만든 마니꼴로, 즉 마니륜이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의 윤장대와 의미가 같다고 합니다.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갔을 때 방울 달린 조그만 마니륜을 다 보셨을 것입니다. 공예로서 불경과 관계된 것 가운데 빼어난 것이 이 윤장대인데 윤장대를 처음 만든 사람은 중국 양나라의 선혜대사 즉, 쌍림 부대사라고 합니다. 그는 중생들이 불경을 가까이하려 하지만 글자를 알지 못하거나, 글자를 알아도 불경을 가까이할 겨를이 없는 사람을 위하여 전륜의 장을 조성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진리를 설파하는 것을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린다고 하듯이, 중생들은 부처님의 진리가 담긴 경전을 굴리는 행위에서 가르침을 얻을 수 있고 윤장대를 돌림으로써 이 사람의 공덕이 불경을 읽는 것과 같다고 하는 자비로운 마음에서 이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현재 운문사에 있는 윤장대에는 화엄경, 법화경,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아미타경, 원각경, 치문경훈, 법화경요해, 자비참법 등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석조여래좌상과 사천왕 석주가 모셔져 있는 작압전으로 가보겠습니다. 작압전에는 어떠한 이야기가 있을까요. 오갑사 중 하나로 현재 운문사인 대작갑사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 가슬갑사, 남쪽으로 천문갑사, 서쪽으로 대비갑사, 북쪽으로 소보갑사 등이 있었는데 사방의 갑사들은 오늘날 모두 폐사되고 서쪽 대비갑사만 대비사로 개명하여 남아 있습니다. 작압전은 운문사의 두 번째 중창자인 보양국사가 당나라에서 불법을 수학하고 귀국할 때 바다를 건너는 중 용왕이 그를 용궁으로 맞이하여 설법해주기를 청하고 설법해준 보양스님에게 금란가사 한 벌을 주고 그의 아들 이목에게 스님을 모시고가 작갑에 절을 지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작'은 까치 작자, '갑'은 산허리 또는 곶 갑자, 즉 '까치곶'이라는 말입니다.

보양스님이 폐사를 일으키려고 산 북쪽에 올라가 살펴보니 뜰에 5층 황금탑이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뜰로 내려왔는데 황금탑이 자취 없이 사라져버려 다시 산으로 올라가 탑이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니 까치들이 땅을 쪼고 있는 것을 보고 보양스님은 '작갑'이 곧 '까치곶'이라는 사실이 생각나 다시 내려와 까치가 있던 곳을 파보니 무수한 전돌이 나오는데 그것으로 탑을 쌓으니 한 장도 남음이 없이 5층탑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보양스님은 여기에 절을 짓고 작갑사라고 하였고 어느 때부터인지 작갑이라 하던 것이 작압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작압전에는 화강암으로 조성된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고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계시는 이 부처님은 앞면에 흙을 두껍게 칠하고 종이를 바른 위에 호분을 입혔으며, 좌우에 둘씩 모두 4기의 사천왕 석주가 배열되어 있습니다. 원래 이 작압전의 위치는 지금의 종무소 중앙에 위치하였는데 1941년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운문사는 본래 대작갑사에서 보양스님에 의해 작갑사라 이름을 고쳤으며 태조 왕건이 운문선사라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라 불렸습니다. 운문사라 한 것은 당나라 때의 고승 운문 문언을 기리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태조 왕건이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오갑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는데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보양스님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밀양 봉성사에 주석하고 계실 때 왕건이 동쪽을 정벌하여 청도의 경계까지 쳐들어 갔는데 견훤의 패잔병들이 이서산성에 들어가 거만을 부리며 항복하지 않자 왕건은 산 아래로 내려와 보양스님에게 방책을 물으니 스님은 이렇게 묘책을 가르쳐주었다 합니다.

"대저 개라는 짐승은 밤을 지키지 낮을 지키지 않으며, 앞을 지키지 뒤를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니 낮에 그 뒤쪽, 즉 북쪽을 치시오."

왕건은 그 말을 알아듣고 산적 무리를 정벌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이러한 인연으로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오갑의 전지 500결을 하사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리고 눈썰미 없는 스님들은 한번도 보지 못했을 지도 모르는 비로전의 천장에 매달린 불퇴전의 화신 악착보살을 만나보겠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비로전에 갈 때마다 악착보살에 대해서 무척 궁금했었습니다. 언제나 물러나지 않고 정진을 하기 위해 반야용선의 뱃머리에 줄을 묶어 길게 드리워 줄에 매달려 정진합니다. 줄을 잡은 손을 놓으면 바다에 떨어져 죽으므로 한 순간도 정신을 놓지 않고 수행하는 불퇴전의 용맹정진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한편, 이조후기 아미타불을 칭명하는 만일염불회가 운악스님에 의하여 운문사에서도 운영되었다고 하는데, 작년에 새로 발견된 아미타불 후불탱화는 그 때 모셔진 것이라고 합니다. 반야용선 뱃머리에 매달린 중생과 오탁악세, 그리고 염불정진과의 관계도 미묘하게 짚이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우리도 이 악착보살처럼 불퇴전의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해야 하겠습니다.

이상으로 윤장대, 작압전, 악착보살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눈을 조금만 크게 뜨고 바라보면 우리 주변에 아끼고 지켜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제대로 아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알기에 애정이 싹트고 활용이 되며 회향으로 나아가 더 큰 발전을 이루는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믿습니다. 무엇이든 제대로 안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는 첫걸음이 아닐까 합니다. 무엇이든 분명하게 대충 흘러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할 때 정견은 저절로 우뚝 서고 육바라밀을 행하여 일체와 함께 하는 삶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대중스님,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

이 현실에서부터 한 걸음을 내딛으시는 것은 어떠하실런지요.


쓸데없는 생각말고 부지런히 공부하라.

날마다 하루종일 누굴 위해 바쁠 건가.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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