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고를 도반삼아
안녕하십니까?
‘병고를 도반삼아’ 라는 주제로 차례법문을 하게 된 사교반 범성입니다.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피해갈 수 없는 생, 로, 병 ,사.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에게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입니까?
저에게는 ‘병고’가 가장 큰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이 자리에서 병고로부터 배운 것과 극복해나가고 있는 과정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방선 게송 중 보왕삼매론이 있지요?
보왕삼매론 제일 첫 번째는 무엇인가요?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싶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치문반 때 처음 이 게송을 읊으며, 저는 참 당황스러웠습니다.
‘모두들 건강하기를 원하고 빌면서, 몸에 좋다고 하면 온갖 것들을 구해먹으며 살아가는데, 어째서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하는 걸까?
다친 발목 인대가 끊어져서 발목인지 그저 발목의 자리에 있는 살점이 붙어 덜렁거리며 있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 되었을 때 이 게송을 읊으며,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정랑 가기가 힘들어서 발을 동동 구르고, 물도 제대로 못 마시는 이 상황에 어찌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하십니까? 제가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았다고 이렇게 병이 생기는 건가요.’
아픔과 괴로움으로 가득했던 시간 속에서, 망가지고 있는 것은 몸 만이 아니었습니다.
의욕만큼 따라주지 않는 자신의 몸에 대한 분노가, 묵묵히 도와주는 도반들에게는 막연한 미안함이 하루가 다르게 커져서 스스로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트레이드 마크였던 애기같이 해맑은 미소를 잃었고, 걱정하는 눈빛들을 따가운 시선이라고 외곡 되이 느낄 때쯤 영화 ‘올드보이’에서 나왔던 어떤 대사가 떠올랐습니다.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 것이다.
어차피 견딜 수 없는 통증은 나만의 것이었습니다. 남의 아픔과 고통의 정도를 백프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그 누군가가 내가 이 병 때문에 얼마나 지쳐있는지, 이게 얼마나 아픈지 이해해주기를 바랬고, 위로받고 싶었으며,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울며, 또 스스로를 원망하며 시간을 보내도 제가 가진 병으로 인한 통증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문득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스스로도 괴롭고 보는 사람들도 괴롭게 해서 나을 병이 아니라면, 어차피 고쳐지지도 않을 병 때문에 아까운 세월을 이렇게 보내느니, 차라리 웃으며 사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을, 마음의 자리를 바꾼 순간, 얼굴에는 해맑은 미소가 돌아오고, 손바닥 뒤집듯이 주변의 공기가 달라지고, 흐름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당시에는 경을 몰랐기 때문에 영화 속 대사가 머리에 맴돌았었는데, 『원각경』 미륵보살장에서 다음과 같은 경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즉지차생(卽知此生)이 성자노려(性自勞慮)하리니
곧 이 일생이 성품 스스로 수고롭게 번뇌했다는 것을 알게 되리니
‘내가 내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구나. 마음자리를 바꾸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 보다 빠르고, 이것으로부터의 파장은 순식간에 퍼져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영향을 받는 구나.’ 이것이 병으로부터의 첫 번째 배움입니다.
두 번째는 발목 인대를 다시 묶는 수술을 하러 간 병원에서의 일입니다.
하반신 마취로 수술 과정을 지켜보며 끊어진 인대가 모니터에 살랑거리는 것을 신기해하는 것도 잠시, 마취가 풀리자마자 쉴 새 없이 무통기를 눌러대도 엄습해오는 통증과 눈 앞이 핑 도는 현기증에 누워만 있다가 수술 3일째 되던 날, 현기증과 울렁거림을 무릅쓰고 바람을 쐬러 휠체어를 타고 병원 로비에 가게 됩니다.
시원한 바람을 쐬고 있자니 죽다 살아난 듯한 기분이 들어서, 문득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어디론가 가보고픈 충동을 느낍니다. 옆을 보니 휠체어 용 길이 있었지만, 수술 후 약해진 몸으로 이용하기에는 무리였습니다.
그때, 다리가 긴 사람은 한번에도 내려갈 수 있을 만큼 낮은 계단이 보였습니다.
‘저 계단 3개만 내려가면 나도 저들처럼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는데! 멀쩡할 때는 일도 아니었는데, 다리를 못 쓰게 되니 저 낮은 계단이 커다란 장애가 되네. 나중에 다리 다 나으면 맘껏 오르락 내리락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병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향하는 순간, 제 주변에 있던 많은 환자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감사한 환경에 있는지, 얼마나 큰 복을 받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환자들 중에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어제 까지만 해도 멀쩡히 두 다리로 걸어 다니다가 눈 떠보니 다리를 영영 못쓰게 된 사람, 손을 잃은 사람, 팔을 잃은 사람 등이 있었습니다.
저는 언젠가 나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고, 수술이 실패했다거나 걸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는데, 만약 내가 갑자기 저들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얼마나 큰 절망감을 느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휠체어에 앉아 아무것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와 같은 상황에 있을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것이었지요. 발목에 병이 없었더라면, 평생 할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병에 걸리고, 왜 하필 나였냐고 울분을 토해본 분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 또한 아프지만 않았어도 행자 때부터 그렇게 하고 싶었던 교화부도 했을 테고, 법고도 치고 싶은 만큼 맘껏 쳤을 테고, 제대로 소임을 살지 못해서 도반스님들 눈치 안 봐도 되고 이런 미안함만 가득한 강원생활을 하지는 않을 텐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온건지 괴로워한 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왕삼매론 첫 번째 구절 기억나십니까?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시간이 지나보니, 교화부를 하려던 것도 욕심, 법고를 잘 치고 싶은 것도 욕심, 소임욕심, 도반스님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심. 욕심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잘 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그런 마음이 불러오는 모든 것들이 몸을 망치고 마음을 망치고 인생을 좀먹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맛지마니까야[중아함경] 중 업 분석의 짧은 경에서는 병이 많은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바라문 학도여, 여기 어떤 여자나 남자는 손이나 흙덩이나 막대기나 칼로써 중생들을 해코지한다. 그는 이런 업을 짓고 완성하여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난다.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나지 않고 만일 인간으로 온다면 어떤 곳에 태어나더라도 그는 병이 많다.
또, 청정도론에서는 병에 대한 근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병이 들면 치료해야 한다. 노력해서 치료해도 사라지지 아니하면 나는 너 몸뚱이의 종이 아니며 시자도 아니다. 너를 시중 들어 주느라 시작도 끝도 없는 윤회의 고통에 빠져있다. 라고 생각하여 몸뚱이에 더 이상 매달리지 말고 수행에 주력한다.
운문사에서 생활하며 배운 것 중 하나는 몸이라는 것은 소나의 거문고 비유처럼 거문고의 줄이 지나치게 팽팽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느슨하지도 않고 적당한 음계에 맞추어졌을 때 아름다운 선율로 연주하기에 적합하게 되듯이, 몸을 지나치게 혹사시켜 수행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또 지나치게 아껴서 나태하지 않도록 잘 조절해나가며 수행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여 이런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날이 온다면,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하고, 마음을 다해서 살면 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어떤 소임이든 겁내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소임이라면 도전하고, 그때마다 찾아오는 고비를 잘 넘긴다면, 고비를 넘길 때마다 인욕하는 힘과 불퇴심이 길러지며, 그로부터의 배움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어 수행할 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기도를 찾아서 기도하세요. 좋은 의지처가 되어 줄 것입니다.
병고는 업으로부터 생긴다고 합니다. 병고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며, 이 모든 것이 업장을 녹여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온전하지 못할 때, 비로소 제 아무리 잘난 사람도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곁을 지켜주는 도반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병고와 싸우고 그로부터 성장해 나가는 동안 그 모습들을 기다려주고 지켜봐주신 든든한 우리 은사스님,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주라고 병고를 주제로 차례법문을 할 수 있도록 오래전에 아이디어를 준 상반스님들, 그리고 세상 누구보다 착하고 넓은 마음으로 군말 없이 받아주고 같이 살아주는 우리 도반스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운문사 사교반. 이 자리에 있게 해준 모든 인연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