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신난득 불법난봉(人身難得 佛法難逢)
하늘은 높고 푸르며 대지는 오곡이 무르익어가는 상큼한 계절, 가을에 차례법문을 하게 된 치문반 우송입니다.
여름철이 지나고 가을철이 되면서 법문을 할 생각에 가슴은 떨리고 막상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고민이었습니다.
인신난득 불법난봉(人身難得 佛法難逢)이라 했습니다. 중국에서 엄마가 저를 가졌을 때 안 낳으려고 산부인과에 갔는데 때마침 정전이 되는 바람에 요행이 세상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인신난득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저는 좀 남달랐습니다. 늘 내가 아닌 나를 지켜본다는 느낌이 들었고 나는 왜 살까? 내 안의 희로애락을 누가 느끼는 걸까? 나는 어느 별에서 왔을까? 막연히 떠오르는 생각들을 풀 수 없어 답답했습니다. 13세 때 진리를 찾아 헤맸지만 아무도 제게 가르침을 주지 않았고 그저 어린 가슴에 깊이 묻어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힘든 일이 있거나 외롭고 괴로울 때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염하였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잊고 살아왔던 제게 한국으로 올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부모형제들의 눈물과 근심 걱정을 뒤로한 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낯선 이국땅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걱정보다 한국에 가면 사찰을 한 바퀴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온 지 10년 만에 불법을 만나게 되었으며, 마치 고비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세상이 더없이 행복했습니다. 처음 천수경을 접했을 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리가 아득히 멀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스며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기뻤습니다. 어떻게 제가 이렇게 큰 은혜와 복을 받았을까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그때부터 기도와 단기출가, 큰스님을 찾아다니면서 법문을 들었고, 여전히 공부에 목말라 있던 저는 불교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갈증과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순치 황제는 황제 자리도 마다하고 출가했는데 무슨 미련이 남아 출가를 못 하는 걸까? 나한테 맞는 옷은 어떤 옷일까?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딜까?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렇게 헤매던 저에게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우연히 동국대에 갔다가 백담사로 6박 7일 용맹 정진을 가게 되었고, 이어서 2차 동국대 용맹 정진에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보살님 한 분을 만나게 된 인연으로 삼천배와 아비라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기도하던 절의 주지스님을 친견하였고 고민들을 털어놓자 저에게 출가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지금의 은사스님께서 저를 상좌로 받아주셔서 드디어 50세 늦깎이 출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행자교육을 받고 사미니계를 받은 뒤, 운문사 강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좌충우돌 치문반 생활을 하면서 강원 생활이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처음에는 무척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때마다 출가할 때 세운 서원과 발심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졌고, 마루를 닦을 때엔 마음의 때를 닦아내듯, 또 풀을 뽑을 때는 번뇌 망상을 뽑아버린다는 마음으로 하였습니다.
저는 이제 이 몸에 맞는 찾아 옷을 입고 법의 향기 가득한 이 도량 운문사에서 회주스님, 교수사스님, 상반스님들의 가르침과 훈습으로 배움의 날개를 펼쳐 만물이 익어가는 황금 계절 가을처럼 법의 향기로운 열매를 맺어 부처님과 온 우주법계에 회향하기를 발원하며 이 자리에 계신 대중 스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선가귀감의 한 구절로 끝을 맺을까 합니다.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편하고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며,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으려고 한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려는 것이며,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고,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서 뛰어나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이다.
이상으로 차례법문을 마칩니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