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전세계가 마비된 듯 했지만,
꽃은 피고 봄을 지나 여름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개학날도 왔습니다.
설렘과 긴장감이 있는 봄철은 아니지만
조금은 익숙해지고 편안해진 6월의 봄철,
몸과 마음을 다시 한 번 가다듬을 수 있는 ‘초심’이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반갑습니다. 화엄반 지안입니다.
좋은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거고
어떤 생각을, 어떤 행동을 해야 좋은 사람일까
어떻게 시작된 지도 모르고
또 어떻게 결론지어야 할지도 모르는 이 화두 속에 파묻혀서
오랜 시간을 온 마음을 스스로 꽁꽁 싸매며 지내온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 궁금증이 생긴 이유를 저는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답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고
마음 잘 쓰는 사람,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갇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겹겹이 틈 없이 쌓아올린 이 고민의 시작은 어디일까
초심.
초심이 어땠던가 생각해봅니다.
지금은 무슨 말년병장처럼 현실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갈피를 못 잡을 때가 많지만
저도 열정적이고 군기 잡힌 초년병 시절이 있었습니다.
싹둑 잘려가는 머리카락을 보며
‘아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는구나.’ 지레 긴장도 했다가
삭발한 머리를 조심스레 거울에 비춰보며
‘어? 좀 어색하긴 하지만 생각보다 잘 어울리네? 역시 출가 잘했지 내가!’ 라며
마음 깊은 곳 차오르는 무언가에 괜히 설레고,
‘그래! 이 대찬 모습으로 무언가 보여주리라!’하며 강렬한 의지를 불사르기도 했습니다.
잠깐 사이에 이전의 저는 사라지고 새로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헤어스타일과 차분하지만 각이 살아있는 패션 덕분일까?
세상이 달라보였고 자신감이 생기면서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그 날의 작은 떨림을 되살려보고 싶습니다.
자경문에 ‘주인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초심과 가장 맞닿아 있는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인공아 청아언하라”
자경문의 첫 문장이 꽤 강렬하죠.
그래서 주인공이 누군데? 바로 물음표가 생깁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초심, 주인공은 어떤 것입니까?
주인공이라고 하면 흔히 드라마 여주인공을 떠올리게 마련인데,
주인공은 대게 어떻던가요?
전체 흐름을 이끌어가는 핵심이면서 또 잘 죽지도 않습니다.
요즘 말로, ‘핵인싸’ (참고로, 핵과 같은 위력의 인사이더) 라고도 하더라구요.
자경문에서는 주인공이라 했지만, 법성게에서는 법성,
사집 때 배우는 선가귀감에서는 한 물건,
사교 때의 원각경과 능엄경에서는 원각과 묘진여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지금 옆 사람 얼굴을 한 번 보시겠어요?
자기얼굴보다 못 생겼나요? 아니면 얼굴이 더 큰가요?
그래도 여기에 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주인공이니까요.
잘 생기고 얼굴 작은 나 뿐만 아니라 누구나 다 갖고 있는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겁니다.
늙어감도 회춘함도 아닙니다. 바로 불멸이죠.
누구나 갖고 있지만 내가 이미 갖고 있다는 것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법화경에 보배구슬이야기가 있는데
‘가난한 친구가 부자친구 집에 들렀다가 부자인 친구가 가난한 친구의 옷 속에 보배 구슬을 달아주었는데 가난한 친구는 그것도 모른 채 평생을 고생하며 가난하게 살더라.’ 라는
법화경 오백제자수기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보배구슬이 ‘변하지 않는 그 무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행이라는 어려운 말로 매 순간 불교를 경험하고 있지만
사실상, 최종목적은 ‘나도 이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갖고 있구나.’
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위함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때때로 불같이 화도 냈다가 세상 다 산 듯 슬퍼도 했다가
즐거움에 환호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표현방법으로 주인공이 모습을 달리하지만,
화내는 사람도 내가 아니고 슬퍼하는 이도, 즐거워하는 이도 진짜 나는 아닙니다.
요즘 전세계인의 화두인 코로나에 비유하면,
코로나로 일상을 잃어버렸다 생각하지만 잠시 다녀가는 손님일 뿐,
잘 다독여서 서운치 않게 보내주면 다시 일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더 쉽게 얘기하면 저를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제자, 혹은 누군가의 도반으로 표현하지만
실은 ‘지안’이라는 이름을 빌린 수행자 그 자체입니다.
물론,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겠지만
지금 있는 그 자리 그대로가 주인공이고 부처입니다.
밥 먹을 때 온전히 밥 먹고, 걸을 때 걸음에 집중하고, 잠들 때 편안하게 잠드는
그게 바로 흔히 말하는 ‘도’이며, 초심 아닐까요?
초심의 사전적 정의에는 ‘첫 마음’ 이외에도
근본·근원의 마음, 본래 마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머리 깎던 때도, 수행이 잘 되는 것 같던 어제도, 엉망진창인가 싶은 오늘도
바로 초심 그대로인 것입니다.
치문은 치문답게, 사집은 사집답게, 사교·화엄은 또 그에 맞게
최선을 다해서 그 자리에서 살다보면 부처님밥값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의 법석이 파하기 전에 ‘초심’이 뭔지, 나의 초심은 어떤 것이었는지
잠깐이라도 생각해보는 시간 가지시길 바라면서..
법문이라고 말하기는 부끄러운 제 이야기 마치겠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