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문을 지나칠 때면 응당 길 양쪽에 둥근 화단을 만나게 됩니다.
따스한 봄, 4~5월에 노랑, 분홍 두 색깔의 튤립이 피고 지고 나면, 6월에서 10월까지 이 여름엔 하얗고 붉은 분꽃이 피어납니다. 이 화단을 가꾸는 건 사교반 소임입니다.
올봄은 아쉽게도 코로나 시국, 늦은 입방으로 튤립을 보는 것도 놓치고 분꽃 싹마저 손이 가지 않아 우후죽순 자리를 못 잡고 있었습니다. 매해 튼튼하고 아름답게 피어있었던 것이 그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항상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들도 소임자가 되어보니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닙니다. 그동안 금당을 지나쳐간 여러 선배님들의 노고를 새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호미를 들고 적당히 솎아 주고 물도 줍니다. 그러는 사이 바짝 마른 잎은 해가 진후에 물을 줘야 잎이 타지 않는다는 도반 스님, 설현당 상반 스님은 흙을 갈아 돋구어 주는 것만큼 좋은 거름이 없다며 조언을 해주고 가시고, 한참이나 오지 않은 비로 시들시들 잘 자라지 못하는 분꽃에 우산을 씌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고, ‘거름을 주면 좋겠다’ 생각만 하고 있을 때 어느새 살며시 거름을 주고 가신 율주 스님, 빈자리 없이 골고루 옮겨 심어주라는 회주스님, 옮겨 심을 때도 가운데는 큰 것으로 가장자리는 작은 것으로, 줄기에 붉은 기가 있는 것은 붉은 꽃이 피고, 그렇지 않은 것은 흰 꽃이 핀다며 조화롭게 옮겨 심으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조언에도 불구하고 비 오는 날을 기다리지 못하고 분꽃을 옮겨 심어 도통 맥을 못 추는 어린 분꽃을 볼 때마다 많이 미안했습니다. 비가 안 왔더라도 담뿍 물을 주고 옮겨 심었으면 몸살도 덜했을 텐데 분꽃의 입장은 고려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잘 자라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을 참회하며 모든 생명을 향한 자비심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됐습니다.
열악한 자리 배치를 이겨내고 모두의 관심 속에서 예년보다 고르지 못하지만 붉은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터키에서 시작해 16세기 유럽 전역에서 귀족이나 대상인들의 사랑을 받은 고귀한 튤립과 남아메리카에서 시작해 달맞이꽃처럼 밤에 활짝 피어 꽃말조차 수줍음인 분꽃. 영어로는 오후 4시 무렵에 꽃이 핀다고 ‘four o’clock flower’ 라고 한답니다.
지난 3년 동안 분꽃을 보면서도 ’낮에 햇볕이 뜨거워 시들어있나‘ 무심코 생각만 했지 늦은 오후에 피는 꽃이라는 것은 생각 밖이었습니다. 화단의 흙을 일구다 보니 흙 속 더 깊은 곳엔 튤립 알뿌리가 이미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내년 봄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는 게지요. 분꽃도 꽃이 지면 씨를 맺고 다시 땅속에서 초여름을 기다립니다. 한 공간에 섞여 있지만 각각의 자리에서 서로 방해하지 않고, 상즉상입 합니다.
명부전 금강경 독경 후에 읽는 법성게가 문득 스쳐 지나갔습니다.
구세십세호상즉, 잉불잡란격별성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구세와 십세가 서로 상즉해 있지만, 뒤섞이지 않고 제 모습을 이룬다.
구세九世란 과거 현재 미래 3세가 있는데, 각각의 3세에 모두 과거, 현재, 미래가 있으니 구세가 되고 3세에 속하지 않는 한순간, 현전일념現前一念 하나를 더 보태서 십세十世라 합니다. 구세십세九世十世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 호상즉互相卽.
그러나 섞이고 혼란하지 아니해서 격별성隔別成 구분되어 따로 따로 이루어진다.
태양처럼 고귀한 튤립과 달처럼 수줍은 분꽃이 한 화단 안에서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몇 해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곳 운문사에서도 죽림헌을 필두로 삼장원 어른스님, 채경당 대학원 스님, 설현당에서는 화엄반, 금당 사교반, 청풍료에서는 사집, 치문반이 각각의 개성으로 묵묵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마치 흙 속의 씨앗들이 숨죽여 인내하며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도 제철을 찾아 피어나는 꽃처럼 말입니다.
코로나 시국에 우리 대중은 한참이나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그 시간만큼이나 함께 밥 먹고 수행하고 잠자면서 서로를 호념하고, 동시에 경책하며 정진하는 대중의 위력을 그리워했습니다.
오분율(彌沙塞部和醯五分律) 제 19권에 “우바리문불優波離問佛 약비구입승중若比丘入僧中 응이기법應以幾法. 불언佛言 응이오법應以五法 일하의一下意 이자심二慈心 삼공경三恭敬 사지차제좌처四知次第坐處 오불론설여사五不論說餘事”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지계 제일 우바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비구가 승가에 들어가려면 몇 가지 법을 실천해야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가지 법으로 해야 하느니라. 첫째는 뜻을 낮추는 것이니 하심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비심을 내는 것이며, 셋째는 공경하는 것이고, 넷째는 차례대로 앉는 자리를 아는 것이고, 다섯째는 다른 일은 논하지 않는 것이다.”
즉, 대중 생활을 하면서 명심하고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덕목으로 자신의 뜻을 내세우지 않으며 하심하고, 자비심을 내고, 공경하며, 차례와 앉고 서는 자리를 알고, 잡다한 말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시국에 이렇게 대중이 모여 수행하고, 그 안에서 전통을 이어나가며 부처님의 말씀을 배운다는 것이 참 소중한 것임을 알게 하는 요즘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중에서의 다섯 가지 덕목을 매일 새기며 구세십세호상즉, 잉불잡란격별성인 우리 대중 각각의 불성이 청정하게 지켜지길 발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