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에 푸르던 회화나무 그 넉넉한 그림자 댓돌을 쓸어도 청풍료엔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매일 밤 오던 달그림자에 이목소는 천년의 세월을 유유히 흘러 보낼 뿐 한 물결도 일지 않았습니다.
노파의 적삼을 빌려 입고 노파 앞에 선 사교반 무여입니다.
‘회화나무 그림자 댓돌을 쓸어도’라는 제목으로 차례법문 하겠습니다.
불법을 알기 전 저의 삶은 겨울과 같았습니다. 삶의 무상함에 늘 마음 한편이 삭막하고 쓸쓸했으며 따뜻한 天地의 은혜 앞에서도 가슴 속 파고드는 추위는 쉽게 녹지 않았습니다.
이내 마음속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거칠게 닫혀가는 철문 사이로 홀연히 멀지도 가깝지도 않는 거리에서 부처를 만났습니다. 겨울 속에 가득 찬 봄날의 따스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겨울 대중 스님들의 추위를 녹일 이야기 한편 들려 드리겠습니다.
능엄경 제 4권의 ‘실라벌성의 연야달다’ 이야기입니다.
실라벌성 안에 연야달다는 나르시스처럼 자신의 모습에 늘 도취되어 살았습니다. 연야달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준수한 모습에 흠뻑 빠져 거울을 항상 가지고 다닐 정도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야달다는 ‘나의 이 머리가 사라진 게 아닌가?’라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의 아내가 평상시보다 거울을 조금 낮게 걸어 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늘 보이던 거울에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만 착각에 빠져 미쳐버리게 됩니다.
그는 거리를 오가며 외칩니다.
“나의 머리를 찾아 주시오! 부디 제 머리를 찾아 주시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연야달다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부처님을 만나게 되는데, 부처님께서 연야달다를 안타깝게 여기며 말씀하십니다.
“연야달다야, 네 머리는 그대로 있다. 머리를 만져 보아라.”
이 말씀에 연야달다는 착각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아~ 내 머리는 원래 그대로구나.’라고.
연야달다가 미쳐서 머리를 찾아 거리를 헤맬 때에도 그의 머리는 결코 없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거울 속의 영상에 집착하여 본래의 참모습을 미혹하였을 뿐이지요.
대중스님들께서는 아직도 이 겨울이 춥습니까? 또, 부처님을 만나기 전 저의 가슴 속에 파고들던 추위는 무엇이었을까요?
산하대지가 홀연히 무명에서 생겨났는데 하물며 지금의 이 추위가 어디에 존재하겠습니까.
큰 착각을 일으킨 연야달다의 사라진 머리처럼, 홀연히 불어온 寒風으로 일어난 삭막했고 쓸쓸히 핀 허공꽃일 뿐이었습니다. 이 허공꽃은 만질수록 깊어가는 상처처럼 미혹과 집착으로 더욱 깊고 커져서 스스로를 空華 속, 중생의 세계에 굳게 가두어버립니다.
천 가지 생각과 만 가지 사량이 화롯불에 떨어진 흰 눈송이와 같음을 안다면 천만가지 분별과 망상은 그저 실체가 없을 뿐입니다. 이것을 투철히 깨닫을 때 우리는 연야달다처럼 스스로 만든 미혹의 병에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어쩌면 부처님의 한마디 말씀으로 바로 머리를 찾은 연야달다야말로 참 수승하고 선근이 깊구나라고 생각됩니다.
‘법화경’의 ‘여아등무이(如我等無異)’, ‘화엄경’의 ‘여불무이(與佛無異)’, ‘여래장경’의 ‘여아무이(如我無異)’. 이러한 가르침은 중생과 부처가 동등한 성품을 갖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모든 대승경전, 대승사상에서 ‘一切衆生 悉有佛性’을 수없이 설하지만 왜 우리는 끊임없이 중생의 삶을 선택하는 것일까요? 그럼 반대로 중생의 삶을 떠난 중도 정견, 부처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원각경, 제 2 보현보살장>를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일체의 보살과 말법시대의 중생 곧, 오늘날 저희를 위해 설하십니다.
‘선남자야, 응당 일체의 허공 꽃인 허망한 경계를 멀리 떠나야 한다. 하지만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굳게 붙들어 쥐고 있기 때문에 쥐고 있는 그 마음도 허깨비 같은 것이니, 또한 다시 멀리 떠나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멀리 떠나고, 또 떠나라고. 이처럼 떠남을 거듭 당부하십니다.
<금강경, 제32 응화비진분>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을 같이 살펴보면.
‘일체 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 같고 또한 번갯불과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해야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갯불. 이 여섯 가지 허공꽃을 ‘應作如是觀’ 하라고 하십니다. <원각경>에서 멀리 떠나라고 또 떠나라고 하시는 말씀이 곧 <금강경>에서 허공꽃을 마땅히 관하는 정념, 알아차림이며 그것이 바로 흔적도, 움직임도, 떠날 것도 없는 不動의 자리이겠습니다.
사향은 몇 겹을 싸서 구석에 넣어도 그 향기를 감출 수 없는 것처럼
우리네 삶속, 불어오는 업풍에 가끔, 혹은 자주 흔들리나 떨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인욕을 닦고, 불법의 大海에서 파도에 휩쓸리지 않게 버둥거리는 정진력이 우리네 감출 수 없는 不動의 향기가 아닐까요?
지난 일 년 숲속의 작은 교실, 더 골든 하우스에서의 나날은 不動의 향기를 지닌 상근기 보살을 통해, 알아차리며 산다는 것의 묘용한 힘을 느끼게 했습니다. 울력으로 몸이 아파도 반의 적은 인원수로 인해 자신이 꼭 나가야 한다고 할 땐 인욕선인의 割截身體 때만큼이나 비장하며, 촌음을 다투며 씻고 가야하는 예불 시간 아슬아슬한데 절대 빠지거나 어기는 일 없는 게 신기합니다. 운문사 삼년에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時空을 초월한 진여의 삶에 향기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발끝까지 파고드는 추위의 열악함에도 그저 그렇게 물 흐르는 대로,
운문사의 푸르던 잎들 청풍 따라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 남아 내쉬는 한 가닥 호흡처럼.
마땅히 순리처럼 戒를 지니고 선정을 닦고 나날을 알아차리며 살아간다면.
고요히 돌아올 봄날의 맑고 그윽한 향은 이미 서 있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겠습니다.
끝으로 대중스님들께 금강경 오가해 중 <제 17 구경무아분>에 야보스님의 게송을 사르며 차례법문을 마치려 합니다.
竹影掃階塵不動 月穿潭底水無痕
(죽영소계진부동 월천담저수무흔)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고
달빛이 못 바닥을 뚫어도 물에는 자취가 남지 않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