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여행길에서 만난 운문사
사집반 형주(亨周)
치문의 생활을 돌이켜보니 다사다난이란 말이 참 잘 어울리는 한 해로 많은 배움과 더불어 나를 돌아보게 한 큰 전환점을 마련해준 고마운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자기변혁을 좌우하는 것은 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체험과 체득의 경험지식이라는 것을 일상을 통하여 가르쳐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치문이란 ‘삭발염의왈치요, 입산수도왈문이라’하여 ‘입산해서 삭발하고, 먹물 옷을 입은 수행하는 스님들의 문중’이라는 뜻이며, 치문의 대지는 알부정遏浮情 계사업誡邪業으로 들뜬 생각을 막고, 삿된 업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지난 치문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행자의 삶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운문사의 치문생활은 무상, 고, 무아를 속성과정으로 체험하게 한 ‘삼법인의 체험현장’ 그 자체였습니다. 매 파트와 철마다 바뀌는 소임들은 고정불변의 내가 없다는 무아를 체험하게 했으며, 다양한 대중 운력과 인수인계와 멘트, 걱정사항 등은 일체개고의 삶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였습니다. 또한 함께 웃고, 싸우고, 생존과 직결되는 배고픔 앞에서는 아수라장으로, 아픈 도반이 발생하면 같이 아파하고 치유하는 자비의 공간으로 변신하는 죄무자성종심기의 변화무쌍한 지대방의 생활은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는 사실과 계절마다 달라지는 운문사의 멋진 풍광은 모든 시름을 잊게 하는 마력으로 무상한 삶을 알려주었습니다.
치문 봄철 큰 부전스님이 들려 준, 상반스님과 어른스님께서 하시는 모든 걱정은 ‘부처가 되지 못할까봐 하는 걱정’이라는 이야기는 아직도 긴 여운을 남깁니다. 모든 수행력은 삶으로 검증되어집니다. 그런데 저를 돌아보면 부처가 되길 거부하는 마라의 제자인가? 라는 의심을 들게도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불교는 이고득락으로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데 모순되게도 저는 강원생활을 하면서 나는 과연 수행자인가?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은가? 라는 물음을 자주 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누구나 고통을 경험하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만든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그곳을 통과해야만 빠져 나올 수 있는 가슴시린 체험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기정화의 시간일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믿었던 신념과 가치관들이 구겨진 종이처럼 내버려지는 경험은 나름 충실히 살아온 삶을 흔들어 버리는 혼돈과 좌절을 맛보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의 허물을 벗으려면 혹독한 성장통을 겪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이렇듯이 태도를 바꾼다는 것은 꽤 많은 수고와 작업이 요구되며, 그 과정은 내가 지금껏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모조리 그릇된 것일 수도 있다는 뼈아픈 인정으로부터 시작되며 꽤 많은 불편함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배움과 성장의 길로 나아가는 길이며, 관계에서 제기되는 많은 갈등은 나를 성장시키는 스승임을 강원에서는 퀵서비스처럼 곧바로 확인 가능합니다. 또한 선행사건에 대한 바른 이해는 사사로운 정이 들어설 수 없는 객관적 관찰과 때로는 죽기 살기로 임하는 비장함과 간절함으로 자기와 정면승부를 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불교적으로 표현한다면 회광반조와 참회는 결국, 자기모순의 자각이며 그것은 곧 자기변혁으로 이어집니다. 지난 습기 덩어리인 검은 소를 길들이기 위해 애쓰며 사는 저의 삶이 때론 안타깝기도 하지만, 업력에서 벗어나 주변 환경에 물들지 않는 원력(願力)의 삶을 살게 하는 힘을 키워주는 강원의 고단한 생활 속에 참 행복이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교용어 중 널빤지를 짊어진 사람을 지칭하는 담판한擔板漢이란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150도 정도의 각도를 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데 짊어진 널빤지 때문에 목적지까지 정면만 쳐다보고 간다고 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고지식한 담판한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배려해주어야 한다고 믿으며, 짐을 내려놓은 후에도 몸에 베인 습관으로 자기도 모르게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성향으로 굳어진다고 합니다.
중소임이 많았던 지난 치문생활에서 나름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는 오만도, 남들처럼 그저 그렇게 살았다는 겸손도 모두 부질없는 메아리일 뿐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바로 담판한이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설정한 수행자란 개념의 틀에 갇혀 그 핵을 보지 못하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으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과거칠불의 공통적인 가르침인 칠불통계게인 ‘모든 악을 저지르지 말고, 모든 선을 행해 스스로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는 지극히 평범한 가르침이지만 깨달음의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일러주고 있습니다.
또한 칠불통계게에 대해 중국 당나라 도림선사는 “3살 아이도 아는 말이지만 팔십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 어렵다”는 실천의 중요성을 꼬집는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나보니 저질체력으로 몸에 자꾸 지는 싸움으로 참 힘들었던 치문생활은 세상을 보는 인식을 바꾸는 수행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기에 좋았습니다.
붓다께서는 존재와 상황을 인식하는 수준이 삶의 질과 태도를 결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문제는 답이 있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성숙해지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원에서 체험하였듯이 출가한 후로 늘어나는 것은 참회와 감사함뿐인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크고 작은 모든 싸움의 시작은 고정불변의 ‘나’가 있다는 무지에서 출발합니다. 또한 다양한 경험으로 알게 모르게 형성된 습관들은 이해의 틀을 가설로 설정하지 않고, 선입견, 고정관념으로 재구성하는 오류로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합니다. 결국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부는 바람에 휘어지는 법을 배우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많이 부족한 제가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처럼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스스로의 선택이며,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매순간 일어납니다. 인간관계는 톱니바퀴와 같은데 그 한축인 자신을 모르면 다른 길로 갈수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이해만큼 타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넓어지는 이치를 일상으로 설법하는 운문사의 강원생활에 감사합니다.
도겐 선사의 ‘불교를 공부하는 것은 나를 공부하는 것이고, 나를 공부하는 것은 나를 잊는 것이며, 나를 잊는다는 것은 일체와 친해지는 것’이란 말이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줍니다. 우리는 저마다 배움을 얻기 위해 이 세상에 왔으며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각자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상호의존적 존재이기에 상호존중의 연기적 자비실천을 구체화하면서 이제부터 강원생활에 적응하고 참회하고 섭수하면서 깨어있는 삶으로의 여행으로 한걸음씩 걸어가고자 합니다.
참 많은 실수를 하며 좌충우돌하면서 지낸 저를 음으로 양으로 너그럽게 봐주신 도반스님들과 대중스님들 덕분으로 알게 모르게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 같습니다. 결국, 홀로 있는 즐거움보다 함께하는 수행의 즐거움을 배우는 곳이 강원일 것입니다. 대중스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깨달음의 여행길에서 만난 운문사 대중스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모두가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두 손 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