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토에 봄이 찾아왔습니다. 매서운 추위가 지나고 봄꽃이 만개했습니다. 호거산 자락의 운문사에도, 수행하는 우리의 마음자리에도 ‘봄’이 한창인 듯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봄내음 머금은 바람이 드는 집-청풍료에서 『꺾어진 고목에서 나를 만나리...』라는 주제로 차례법문을 하게 된 사교반 도안입니다.
출가 전, 저의 생을 뒤덮었던 주된 마음 작용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영유아기부터, 인정과 사랑에 대한 갈망과 불안감은 자리 잡았습니다. 그에 따른 끊임없는 내적 고뇌도 시작되었습니다. 생의 초반부터 이러한 고뇌가 일어나다니, 역시 우리네 삶은 고(苦)덩어리 입니다. 이러한 마음 작용이 일거수일투족에 다 들어나 나의 삶을 이루고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점차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자각하기 전, 우리는 무수한 방어기제로 자신을 감쌉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면 자신이 무너질까 두렵고, 동토에 발가벗겨진 존재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나라고 할 그 무엇이 없는데 업에 짓눌려 감정의 노예가 되어 한평생을 살아갑니다. 그 당시 저의 멘토는 ‘장자의 쓸모없는 나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장자가 산 속을 걷다가 큰 나무를 보았는데 가지와 잎이 매우 무성했습니다. 그런데 목수는 그 나무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본 장자는 "이 나무는 재목으로서 쓸모가 없기 때문에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리는 구나"라고 하였습니다. 곧게 잘 자란 나무는 쓰임새가 많아 여러 용도로 베어지지만, 옹이투성이의 뒤틀리고 굽은 나무는 살아남습니다. 그런데 재목으로서 쓸모가 없어 살아남은 나무는 그늘이나 쉼터로 이용됩니다. 그러므로 단편적 견해로 쓸모없다고 자학하며 의기소침해할 필요도 없고, 쓸모 있기 위해 타인의 기준에 끼워 맞추려 애쓰며 전전긍긍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쓸모가 있다해서 그것이 최고인 양,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여 으스댈 필요도 없는 것이니, 그저 모든 존재는 존재 자체로 소중하고 아름답습니다. 화려한 붉은 장미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 들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이름 모를 들꽃도 나름의 아름다움과 가치가 있듯이 말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스스로 짓거나 남이 지어놓은 ‘나’라는 기준을 조금씩 놓아버리고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석가모니불이 ‘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말했듯이, 내가 존귀하기에 모든 존재가 존귀하다는 이치를 그때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나란 도대체 무엇인가?’, ‘나란 누구이기에 끊임없이 자신을 규정짓고 남을 의식하는 것인가?’, ‘무엇이 나이기에 나는 이리도 이 몸뚱이에 집착하고, 찰나의 감정에 놀아나 일희일비하는 것일까?’, ‘나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망념 속에서 한평생을 살아가고 있을까?’, ‘과연 무념무상의 상태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답을 구하고자 숙명처럼 수행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새중 때 우연히 摧殘枯木(최잔고목)이란 문구가 적혀 있는 성철스님의 법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부러지고 썩어 쓸데없는 막대기가 있다. 최잔고목(摧殘枯木)이라고 한다. 이렇게 쓸데없는 막대기는 나무꾼도 돌아보지 않는다. 땔나무로도 쓰일 수 없기 때문이다. 불쏘시개도 되지 못하는 나무 막대기는 천지간에 어디 한 곳 쓰일 데가 없는 아주 못 쓰는 물건인데, 이러한 물건이 되지 않으면 마음 닦는 공부를 할 수 없다. 자기를 내세우면 결국 저 잘난 싸움 마당에서 춤추는 미친 사람이 되고 말아서 마음을 닦는 길은 영영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아무 쓸 곳이 없는 대낙오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영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해서 버리고, 세상을 아주 등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버림받은 사람, 어느 곳에서나 멸시당하는 사람, 살아가는 길이 마음을 닦는 길 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읽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습니다. ‘쓸모없는 나무’보다 더 ‘쓸모없는 막대기’가 되어야 한다니...이 말은 ‘진속이제’의 관점에서 ‘무아’에 대해 속속들이 꿰뚫어 크고 환하게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거짓 나’가 무어라고, 무아를 통절히 깨닫기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 ‘거짓 나’가 ‘거짓 나’인지 모르고 속아 넘어가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장애를 뛰어넘지 못하고 ‘거짓 나’에 안주해 있었습니다. 차라리 ‘쓸모없는 막대기’가 되는 것보다 ‘쓸모없는 나무’나 ‘쓸모 있는 나무’가 되는 것이 쉬운 듯 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 쓸 곳이 없는 대낙오자가 되어 오직 영원을 위하여 마음 공부하는 공부인이 될 수 있을까..간절히 원하기는 하나 저의 익숙해진 존재 방식을 철저히 거스르는 길이기에 두려움이 앞서 은사스님 앞에서 눈물로 호소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 공부하는 것이 ‘할 수 있다, 없다’, ‘하기 쉽다, 어렵다’의 개념 이전에 ‘가야만 하는 길’이고, ‘해야만 하는 공부’라는 것을 철저히 믿습니다. 지금은 강원에서의 모든 경험이 저를 성장시킵니다. 허리디스크로 고생 했을 때,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 몸도 마음도 위축되었습니다. ‘위축된 나’에 대해 사유해보니, 원인은 이근에 머무는 칭찬이나 꾸지람에 좌지우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일과 더불어 수행하며 다만 ‘일을 할 뿐’이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끝없이 분별을 내기도 하고, 이 몸이 무상한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남이 평가하는 내가 ‘참 나’인줄 착각하여 감정의 노예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 사실을 알기에 마음이 한결 편안합니다. 철저히 ‘무아와 무상’을 자각해야 합니다. 매순간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깨어있는 시간이 1초, 2초, 3초..1분, 2분 늘어날수록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주인이 되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봄에 관련된 한시 한편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공산춘우도라는 그림 속에 화제(畵題)로 들어있는 글입니다.
空山春雨圖(공산춘우도) -戴熙(대희)
空山足春雨(공산족춘우)하니 緋桃間丹杏(비도간단행)이도다.
花發不逢人(화발불봉인)이나 自照溪中影(자조계중영)이로다.
빈산에 봄비 내려
빈산에 봄비 넉넉하더니 사이사이 울긋불긋 복사꽃 살구꽃
꽃은 피었건만 보는 이 하나 없어 물에 비친 제 그림자 저 혼자 들여다보네.
보는 이 하나 없지만 물에 비친 제 그림자 저 혼자 들여다 볼 수 있는 수행자가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