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하심, 회광반조(廻光返照)의 시작]이라는 이야기로 차례법문을 하게 된 사집반 유심입니다.
회광반조란 “빛을 돌이켜 비추어 보다”라는 뜻이고 선에서는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말과 글자를 초월하여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다”는 뜻입니다. 임제 의현선사께선 “너는 말이 떨어지면 곧 스스로 회광반조 할 것이며 다시 다른데서 구하지 말 것이니 이러한 신심은 부처와 다르지 않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회광반조의 설명은 치문을 배울 때에도 몇 번 들었지만 그렇구나하고 가볍게 넘어갔습니다.
그 후 사집에 올라와 도서를 배우는 중 “況阿難은 多聞總持호대 積歲를 不登聖果라가 息緣返照暫時코사 卽證無生하니..”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아난은 부처님 말씀을 많이 들었으나 세월이 흘러도 깨닫지 못하다가 연을 쉬고 반조하는 잠깐사이에 무생법인을 증득하니..”의 뜻입니다. 여기에서 “息緣返照”란 외부경계를 반연하는 緣慮心을 끊고 안으로 관조하여 자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緣慮心』이란 도서에서 마음의 4가지 뜻 중 하나로 ‘팔식의 식 하나하나가 각각 자기의 나름대로의 경계를 반연한다’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타스님의 법어 중 ‘다가오는 인연 속에서 일어나는 평소의 마음상태이다’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또 ‘순간순간 보고 듣는 것에서 분별하여 내는 마음이다’라고 탄허록에도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즉 일상 순간마다 일어나는 마음을 끊고 안으로 자기를 살피고 돌이켜 보라는 것입니다. 회광반조와 뜻을 같이 하는 구절이었습니다. 돌이켜 본다!!! 바로 회광반조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회광반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빛이란 뭐지? 일어나는 마음을 어떻게 돌이켜 볼 수 있을까?’ 그러다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빛이란 바로 나의 마음, 나의 생각, 나의 행동이다. 어떠한 조건에서 일어나는 모든 나의 행위이다.’
그 다음엔 ‘이렇게 일어난 빛을 어떻게 돌이켜보지?’였습니다.
‘일어나는 마음, 생각, 행동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하심이다.’
처음에는 “네, 잘못했습니다.”, “알겠습니다.”의 무조건적 하심이 필요합니다. ‘내’가 가진 생각으로 외부경계에 반연하는 온갖 생각들이 일어나면 계속 ‘내’생각을 이해시키고 누르고 다독거려야 합니다. 그렇게 한 후 ‘나를 내려놓는 하심’을 통해 순간순간 일어나는 마음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대상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 생각, 행동 등으로 인해 상대와의 관계를 맺어 주고받음이 있고 즐겁다거나, 싫다거나, 좋다는 생각 또는 고정관념이 생기게 되는 등 다양한 반응과 결과가 있게 됩니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우리는 스스로를 살피고 자각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대상과 하나가 되지 못한 나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때가 바로 “회광반조-빛을 돌이켜 살피기”와 “하심-나를 내려놓는 마음”의 힘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를 내려놓는 마음”을 알 수 있을까요?
출가하는 날 “하심하면서 살아라.”라는 은사 스님의 말씀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다시 여쭈었습니다. 스님께선 “인욕하면서 살면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무조건 하심을 했습니다. 몰라서도 실수하고, 내 마음대로 하다가 실수하고, 바빠서 실수하는 등 가지가지의 실수를 하여 많은 걱정을 들었습니다. 제가 매일 하는 말은 “잘못했습니다.”, 혹은 “시키시는 대로 했는데요.”였고 매일 하는 생각은 ‘언제 말씀드려야 적게 혼이 나지?’였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인욕만 했습니다. 그때의 인욕은 은사스님에 대한 인욕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또 어김없이 은사스님께 걱정을 들었습니다. 그 때는 홀연히 “내가 왜 걱정을 듣지? 왜 스님을 걱정시키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제가 어떠한 행동과 생각을 하였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 내 마음 속엔 여쭈러 가기 귀찮은 마음과 내가 옳다는 생각과 스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은사 스님의 “하심하라.”라는 말씀이 나를 내려놓아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대방과 하나가 되라는 것이며 스스로를 살펴보라는 뜻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연 스님께서 하심에 대해 처음부터 하나하나 조목조목 설명해 주셨다면 내가 이해했을까? 또한 그 뜻을 이해해도 어떠한 일이 생겼을 때 과연 돌이켜 다시 생각할 수 있었을까?’하며 저는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 무조건적 하심을 통해 ‘하심’이 바로 나를 내려놓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이렇게 아는 것이 회광반조와 같은 뜻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선에서 회광반조를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은 자리이며 부처의 자리라고 합니다. 그럼 제가 말한 회광반조와 다른 뜻일까요? 선에서의 회광반조와는 다소 의미가 다를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실은 다르지 않습니다. 선에서의 회광반조를 횃불이라고 한다면 제가 말한 회광반조는 부싯돌의 역할입니다. 부싯돌이 여러 번 탁탁 부딪치며 잠깐 밝았다가 사라집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부싯돌에서 불이 붙듯이 끊임없이 하심을 통해 자기를 살피고 돌이켜 보면 언젠간 중생을 훤히 비추는 횃불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대중 스님들께선 무조건적 하심을 통해 나를 내려놓고, 나를 내려놓아 대중과 하나가 되며 그 대중을 통해 나를 바로 보아서 헛되지 않게 수없이 부싯돌을 부딪치다가 아난존자처럼 문득 회광반조하는 사이 무생법인을 얻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회광반조에 대한 짧은 법문을 들어주신 대중스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또, 2년간 도량에서 맘껏 생활할 수 있게 옹호해주신 도량신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