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는 삶의 본질이 괴로움이라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외에도 수없이 많은 괴로움이 존재하지만, 저는 그중에 나이가 들수록 꽉 막혀가는 제 자신을 보는 것이 가장 괴로운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누구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이 들고 싶어 합니다. 마음은 너그러워지고 행동도 더욱 성숙해지고, 어른답게 되어 가는 것을 꿈꾸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현실은 점점 더 남들과 소통하지 못해서 고집불통에, 호통만 치고 훈계를 하려는 사람이 되어가지요. 이른바 ‘꼰대’가 되어가는 겁니다. 어쩌면 이미 그럴지도 모릅니다. 희한하게도 나이를 먹을수록 말도 안 되는 일에 고집을 부리거나, 왜 그렇게 주변사람들을 들들 볶는지, 호르몬 문제라며 구차하게 덮어 보지만 아무도 안 속습니다. 괜히 쓸데없는 일에 자존심을 세우고 마음을 쓰다 보니 몸은 더 아픈 것 같고, 다른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하니 은둔형 외톨이가 될까봐 겁이 나고, 이래서 고독사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실감할 때가 많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후회한들 되돌아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될 때마다 이번 생은 포기해야 되나 싶고, 다시 엄마 뱃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체성에 혼란이 옵니다.
안타깝게도, 저에겐 노화를 멈추게 하는 특허기술도,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무슨 복인지 출가를 통해서,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제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바꿀 수 있는 좋은 방법이 「금강경」속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바로 이 구절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만 잘 살기 위해서 수보리가 부처님께 이런 질문을 한 게 아니죠. 내 안에 이기적인 마음을 어떻게 항복 받아야, 남을 잘 이해할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겁니다. 이 질문에 대해 부처님의 답을 무착⦁규봉스님은 네 가지 마음으로 정리해주셨습니다.
첫 번째가 광대심廣大心입니다. 광대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교화의 대상으로 여기고 관심을 가지라는 겁니다. 일체중생을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보호하며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제일심第一心입니다. 일체중생을 모두 포섭하여 그들의 고통을 다 해소하고 무여열반으로 이끌어 주는 보살행을 말합니다. 비록 내가 아직 부처가 되지 못했을지라도, 모든 중생들이 완전한 열반에 들도록 이끌어 주려는 노력이므로 가장 어렵고 실천하기가 힘든 마음입니다.
세 번째는 상심常心입니다. 글자 그대로 ‘항상한 마음’입니다. 이것을 남전스님은 선적용어로 ‘평상시도平常是道’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성품이 본래 공하여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청정심’을 유지하면, 그것이 곧 ‘평상심’이 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네 번째는 부전도심不顚倒心입니다. 중생이 ‘나는 부처가 아니다.’, ‘공부를 해도 부처되기 어렵다’고 하면서 자기비하를 하고 스스로 중생이라는 분별심을 내는 것이 전도심입니다. 그 전도된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게 부전도심입니다.
사실 이 네 가지 마음四心은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고 가지고 있지만, 눈앞의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남을 위해 이런 마음들을 사용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출가를 기점으로 예전의 제 모습과 지금의 제 모습을 비교해본다면, 그 전보다 덜 괴롭고 조금 더 행복하긴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항복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항하는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항복’이라는 말 자체의 뉘앙스가 뭐랄까, 누군가에게 처절하게 진 것만 같고, 뭔가 굴욕적인 거 같아서 반감이 들긴 했지만, 「금강경」을 통해 ‘항복’은 내 안에 철통같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부수어 내고, 광대심⦁제일심⦁평상심⦁부전도심을 내어 마음을 조복調伏받아서 나와 타인을 배려하는 행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 마음속에 후회와 괴로움이 존재하는 이유는, 시련이 찾아올 때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일겁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건, 마음을 제대로 항복받지 못하였기 때문이죠. 마음을 항복받지 못한 건, 불법佛法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출가만 하면 쉽게 믿어질 것만 같고, 금방이라도 도인이 될 것만 같았는데, 그런 기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믿지 않고는 교리理조차도 알 수 없고, 행行도 닦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매 순간순간 선택을 하고 있었고, 그 선택들이 모여 제 인생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 가운데에 나는 어떤 마음을 택하여 살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는 대한 갈피를 잡았습니다. 더 이상 제 선택에 후회하고 투정이나 부리는 철부지 짓은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나의 ‘如是降伏其心’에 대해 사유하며 어떠한 괴로움에도 쉽게 동요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성숙한 어른으로 아름답게 나이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