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꽃이 앞다투어 피는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두두물물(頭頭物物)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잠 깨어나는 생명의 소리로
이 호거산은 온통 수선스럽습니다.
향기로운 봄꽃의 향연의 계절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굴레’라는 주제로
차례법문을 하게 된 사집반 동암입니다.
부처님이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도제(都提)의 아들 앵무마납(鸚鵡摩納)이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부처님. 어떤 인연으로 중생들은 다 같이 사람의 몸을 받았으면서도 지위가 높고 낮으며, 얼굴이 잘생기고 못생겼으며, 목숨이 길고 짧으며, 병이 있고 없으며, 위덕이 있고 없으며, 비천한 집과 존귀한 집에서 태어나며, 재물이 많고 적으며 총명하고 어리석게 되나이까?”
“그것은 중생들이 자기가 행한 업 때문이니라. 지은 업에 따라 갚음을 받으며 업을 인연하여 높고 낮음이 생기는 것이니라.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수명이 짧은 것은 다른 생명에게 모질게 굴거나 짐승을 죽여서 그 피를 마셨기 때문이니라. 어떤 사람이 병이 많은 것은 주먹이나 막대기로 다른 생명을 못살게 굴었기 때문이니라. 얼굴이 못생긴 것은 성질이 급하고, 번민이 많아 화를 잘 내고, 걱정과 질투가 많아 다른 사람과 자주 다퉜기 때문이니라. 위덕이 없는 것은 남이 존경을 받으면 질투하며, 남이 좋은 물건을 가진 것을 보면 내 것으로 만들고자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니라.
어떤 사람이 비천한 집에 태어나는 것은 공경할 사람을 공경하지 않고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오만하고 방자하게 굴었기 때문이니라. 가난하고 재물이 적은 것은 빈궁하고 고독한 사람, 수행자나 거지에게 음식이나 옷,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생필품을 보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어떤 사람이 어리석은 것은 자주 지혜로운 이를 찾아가 참다운 진리를 배우지 않고, 죄가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묻지 않으며, 검고 흰 것을 깨우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 중아함 44권 170경 〈앵무경(鸚鵡經)〉 -
이 경은 부처님이 앵무에게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이유와 수명, 질병, 생김새 등에서 차이가 있게 되는 이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인과응보의 굴레에서 벗어 날수 없는 것일까요?
인과응보에 의한 윤회의 반복은 불교의 중요한 교리 가운데 하나인데요.
가끔은 인과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나쁜 일을 많이 하고도 잘 사는 사람을 보면서 인과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요?. 그것은 숙세의 업이 언제 나타나느냐 하는 것이지 인과의 법칙이 무너졌기 때문은 아닙니다.
현생에서 지은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현생에서 받는 것 순현법수업(順現法受業).
다음 생(生)에서 받는 것 순차생수업(順次生受業).
다음 생(生) 이후에서 받는 것 순후차수업(順後次受業). 이를 삼시업(三時業)이라고 합니다.
만약 우리의 삶에 인과응보가 없다면 이 세상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떵떵거리고 잘 살고, 착한 일을 한 사람이 무릎을 꿇어야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는 절대 그런 일이 없습니다. 한때 잘나가던 사람이 초췌한 얼굴로 영락(零落)하고, 지지리도 어렵게 지내던 사람이 어느 날 벌떡 일어서는 모습은 인과가 역연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상에는 아직 정의가 살아있다’는 말은 누구도 인과의 법칙을 피해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한데요. 이 경전은 그런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고통을 받는 이를 볼 때 전생에 빚이라고 쉽게 말하거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불교를 조금 아는 사람은 모든 것에 자신의 탓이라면 참회를 합니다. 물론 그게 잘못되었다는 건 아닙니다. 얼마 전 저는 사형과 이야기를 중 인과(因果)에 대해 다시생각 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행자시절에 좋은 어른스님과 소임자 스님 덕분에 편안한 행자생활을 했지만, 저를 마땅찮게 여기는 상행자 덕분에 맘 고생 많은 행자시절을 보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전생에 업 때문에 이런 힘든 인연을 만났구나 하는 생각에 참회의 절도 하고, 반성도 했지만 이상하게 진심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저의 모습을 보면 못나고 한심한 생각에 자괴감도 느꼈습니다. 사형이 말하기를 “그것이 과(果)가 아니라 인(因)이면 어쩔 거예요? 부처님은 모든 생을 다 볼 수 있는 혜안(慧眼)을 가지고 있어 인과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지만, 과연 우리는 어떤 근거로 과(果)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
이 말을 들었을 때 머리를 땅 치며, 그동안 제 마음 한구석에 밀쳐두고 있던 의심을 조금은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런 오류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요? 자신의 모습은 바로보지 않으면서 타인의 잘못을 이야기 하며 뒤에서 흉도 보고 욕도 합니다. 마치 내가 남 흉 보는 건 당연한 결과 마냥 상대방은 욕먹고 무시해도 된다는 듯 치부하는 우리를 봅니다. 자신의 분상으로 말이죠, 나 자신을 속이고 지금이 바로 인(因)이 라는 사실을 망각하며, 그것이 마치 결과물인 듯 떠드는 우리......
그럼에도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이유는 수행자라는 것입니다. 밖으로만 부산하게 떠도는 시선을 내 안으로 돌려, 나를 보려고 하고 반성하는 과정 속에서 한발한발 수행자로서, 새로운 인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오는 과보는 잘 받아 회향(回向)하는 그날, 우리는 인과의 굴레에서 벗어나 부처 이루는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지요. 며칠 전 교수스님께서 우리가 불자로써 태어나는 이유에 대해 말씀 하셨습니다. 더 나아지기 위해 우리는 세상에 태어난다고 하신 말씀처럼, 오늘은 좀 모자라지만 내일은 한 걸음 나아가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오늘도 춘래초자청(春來草自靑)한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