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소임 - 사집과 대호

최고관리자 | 2016.07.26 10:29 | 조회 2019



소임
                                                                                                                                                                                   사집과 대호


온갖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다는 말에 주저 없이 중시자를 선택했습니다. 인수인계 때 가본시자실은 신천지였고 여름철 소임에 기대를 부풀게 했습니다. 그러나 개학을 기다리며 대중소임에 중소임이란 압박이 서서히 옥죄어 왔습니다. 뭐에 씌였었구나 왜한다고 했나 후회와 걱정으로 날은 흘렀고, 그래서 시작한 중시자는 저의 가장 취약한 부분만 요구하는 듯 했습니다.

흔히들 내 자신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의욕에 넘쳐 소임을 시작합니다. 눈치 없고 솜씨 무딘 저였지만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근데 일을 해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임무완수에만 정신이 팔려 내일을 도와주고 함께 가는 스님의 행동을 지적하고 통제하려하고, 신경은 예민 해져서 웃어넘길 수 있는 말에 상처를 입게 되고, 저마다의 기준 저마다의 생각이 확고하다 보니 매사가 시비거리었습니다. 좋았던 사이가 소원해져서 나온다더니 남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소임을 살 바에 업장만 되어 안 사는 게 낫겠다며 울던 한 스님이 생각났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혼자 있고만 싶어졌고 몸과 마음은 젖은 솜처럼 무겁기만 했습니다.

소임을 잘사는 게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운문사에서는 소임이 매우 중요합니다.
소임자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대중이 힘든가 힘들지 않은가가 결정됩니다. 또 소임자는 맡은 소임을 통해 참 수행자로 거듭나기도 합니다.
내가 소임을 잘산다고 생각할 때 대중은 힘들 수 있습니다. 자신이 맡은 범위를 잘하는 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함께 어우러져 조화로운 시너지를 내는 건 더 중요합니다.
혼자 아무리 열심히 잘산다 하더라도 같이 들어간 소임자들 중 한사람이라도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세 명 모두에게 힘든 소임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세 사람이 화합이 안 될 때 그 에너지는 대중에게 전달되어 소임은 삐걱되게 마련입니다. 수행자로서 소임을 산다는 건 밖에서 하듯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고 인정을 받고 화려한 이력을 쌓기 위함이 아닙니다.

익숙하지 않은 일에 걱정을 듣는 건 당연하고 걱정을 들어서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고 머터러운 부분이 깎인다면 그건 그것대로 기꺼이 받을만한 괜찮은 거라 생각됩니다.
남보다 나은 능력이나 경험이 있을 때 못한 사람을 답답해하기 쉽지만 능력이란 그렇게 남을 답답해하라고, 또는 능력자를 돋보이라고 있는 건 아닐 겁니다. 못한 사람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 위함이고 그래서 모두 함께 더 나아지기 위함일 겁니다.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더 많이 수용할 수 있어야 하고, 잘 하는 사람이라면 질책이 아니라 격려를 하며 기다려 주고 함께 가야합니다.
내기준, 내 고집 ,내 생각으로 잘잘못을 따지고 시비가 끊어지지 않는다면 뭐하러 사랑하는 사람들을 끊고 머리를 깎았겠습니까. 도는 멀리 있지 않다는 걸 깨닫습니다.

먼 훗날 이럴까 저럴까 계획을 세우고, 영험 있는 기도처를 찾고, 청정한 수행도량을 간다고 떠들썩하지만 그런 곳을 간다 해도 내 마음이 분별심과 탐진치로 꽉 차 있다면. 3000번 절을 하고 금강경100독을 한들 업을 녹이기 어려울 것이고. 지금 생활하는 이곳에서 참회의 눈물 한번을 흘린다면 그보다 더한 기도처 수행처는 없을 것입니다.
바로 지금 내 옆의 도반이 내가 연민심으로 도와야 할 사람이고, 지금 맡은 소임이 참수행자로 거듭날 수 있는 수행 방편이고. 150여분의 살아있는 부처님이 계신 여기 운문사 강원이 내가 기도하고 수행하며 행동해야 할 곳입니다. 청정한 기운은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애착을 끊고 번잡한 속세를 떠났다 여겼지만, 자기중심적 분별심으로 마음에 온갖 차별을 두어 하루에도 열두 번 육도윤회를 하며 갖가지 세계를 오르내렸으니 너무 부끄럽습니다.

古來得道之士는 自己를 旣充足하고 推己之餘하야
應機接物에 如 明鏡 當臺하며 明珠在掌하야
胡來胡現하며 漢來漢現호대 非着意也라

옛부터 도를 얻은 선비는 자기를 이미 충족하고 자기의 나머지를 미루어서 근기에 응하여 중생을 접함에 밝은 거울이 거울 틀에 있음과 같으며 밝은 구슬이 손바닥에 있음과 같아서 오랑캐가 오면 오랑캐를 비추며, 한인이 오면 한인을 비추대 뜻으로 집착함이 아니로다. 라는 서장에서 인상 깊었던 대혜스님 말씀으로 법문을마칠까합니다.

감사합니다.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