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대교반 윤상스님

최고관리자 | 2015.01.19 12:43 | 조회 2835

윤상 / 대교반

 

앙상한 나무들이 차가운 바람을 이겨내고 있는 겨울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대교반 윤상입니다.

걸망을 메고 매서운 바람을 뚫으며 처음 운문사에 들어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어느덧, 강원생활의 회향을 앞둔 지금 처음으로 돌아가 진지하게 나 자신과의 대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무소의 뿔처럼 홀로가라’ ‘너 자신을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반면, 아함경에서는 아난이 부처님께 이러한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수행자에게 좋은 도반이 있으면 그 사람은 수행의 반성을 완성한 것이 아닐까요?”

이에 부처님께서 고개를 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그렇지 않다. 좋은 벗이 있다는 것, 좋은 동무가 있다는 것,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은 수행의 전부를 완성한 것과 다름이 없느니라.”

스님으로 살면서 홀로임을 염두해 두고, ‘스스로에게 철저하고,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 써서 거스름 없이 살겠노라다짐했던 나의 부족한 각오였음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불보살님께 올리는 새벽예불과, 함께하는 발우공양시간, 배우는 경전을 소리 내어 독송하는 시간 등 마냥 어렵고 빈틈없이 짜여진 시간들이 부담스러워 아름답던 운문사의 하늘과 새소리에도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던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마치 살얼음 위를 걷는 것만 같았던 대중생활의 나날들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지금은 모든 일들이 체습이 되어 여유를 느낄 정도가 되었으니, 강원생활의 과정을 통해 진정한 스님으로 조금 물들었나봅니다.

방학이 끝나 강원으로 돌아올 때면, 고된 강원생활이 떠올라 은사스님 앞에서 눈물을 참지 못하고, 투정을 부려야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고된 강원의 하루는 천일처럼 느껴지고, 알 수 없는 미래가 현실로 다가와, 믿음이 나약해져 힘겨운 나날들의 연속 속에서 지금까지 여전히 한걸음씩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은 같은 길에서 뜻을 함께하며 탁마해주던 도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중 생활 속에서 나태함을 느낄 때면, 대중규율을 지키는 도반스님을 보며, 나의 게으름에 따끔한 경책과, 시주자의 은혜를 생각하게 해주었고,

가끔, 도반스님의 행동이 이해가지 않을 때면, 서두르지 않고 포용력으로 너그러이 이해하는 도반스님을 보며, 한없이 어리석고, 욕심에 찬 나 자신을 발견하게 해주었습니다.

, 힘들어하는 도반스님을 마주할 때면, 내 일처럼 적극적으로 걱정과 위로를 하며, 사사롭고 잡다한 일을 도맡아 하는 도반스님을 보며, 나의 부끄러운 자비심을 느끼게 해주었고,

대중생활이 항시 순탄치만은 않기에, 그 속에서 갈등이 생겨, 불평이 일어날 때면,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열심히 기도하는 도반스님을 보며, 나의 신심에 다시 발심을 고취시키게 해주었으며,

잠을 청할 때조차도, 어둠속에 잠자지 않고, 이불을 방석삼아 앉아있는 도반스님을 보며, 나의 원력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항상 생활 하나하나 속에서 의식을 깨울 수 있었던 것은 부족함이 드러날 때마다 탁마해주던 도반스님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도반스님은 철저한 나의 거울이 되었으며, 수행자가 공부를 해 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대중생활이 곧 자유인이 되기 위한 수행의 첫걸음이며, 자기를 낮추고, 믿음의 싹을 키워가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스스로를 느끼게 해주는 소중한 시간임을 알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비로소, ‘지금에서야 살아있는 멋있는 시간들이었구나! 하며 감사할 수 있었고, 모든 것이 첫 경험었던 운문사생활에 부족한 것이 많아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늘 부족하고 표현이 서툴러 뇌롭게했을 지난 시간들속에서도, 묵묵히 옆을 지켜주던 나에게 더 없이 소중한 기억들을 심어준 도반스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모든 대중스님들의 공덕으로 수행을 삼으며, 모든 인연께 감사드립니다.

대중스님 여러분 !

청해서 가는 벗은 소극적이기에, 청하지 아니해도 가서 함께 도와주는 벗 (不請之友) 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정진 여일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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